“살아있는 말 수집하려 술자리에서 귀 기울였죠”
각별한 의미를 담은 공연이면 어김없이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국립극단은 창단 70돌 공연작(화전가)과 ‘백성희·장민호 극장’ 개관작(3월의 눈)을 그에게 맡겼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돌(2019년) 기념 오페라 ‘1945’도 그가 썼다. 부산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 오페라 대본도 집필 중이다. “대본에 향기와 품위가 있어요. 이 작가 작품만 받아도 절반은 했다는 신뢰가 있거든요.” 원로 배우 손숙(79)은 연극인생 60년 기념작으로 그가 쓴 ‘토카타’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세 극작가’ 배삼식(53·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얘기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출국 채비에 바빴다. 그가 대본을 쓴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유, 리듬감 있는 문체, 시적 이미지가 넘치는 그의 대본은 한편의 산문시를 방불케 한다. 한국어의 말맛을 살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드러낸 그의 글쓰기는 창작과 각색을 넘나들고, 정극과 창극, 마당놀이와 뮤지컬, 오페라에 전통 정가 가사로 이어진다. 최근엔 음악과 관련된 글쓰기에 더욱 몰두하는 모습이다.
“판소리는 표현력이 풍부해요. 랩과 현대음악까지 끌어안거든요.” 그는 “판소리란 예술형식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물결처럼 말들이 출렁거리는 아름다운 판소리 사설에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지난해 초연한 창극 ‘리어’도 그가 썼는데 내년 국제무대 진출을 앞두고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 노장사상 색채를 입혀 신선한 각색이란 평을 얻었다. 그는 “고양된 에너지를 전제로 하는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희곡들이 창극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의 첫 작품이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을 각색한 ‘오랑캐 여자 옹녀’였다.
배우 손숙이 주연하는 그의 신작 ‘토카타’는 촉각과 접촉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기에도 음악적 요소가 담겨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서늘하고 괴팍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 “인생은 잔혹하고 차갑고 쓸쓸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걸 진지하게 얘기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출렁임을 겪게 되죠.” 그는 “손쉽게 치유와 위로와 희망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제가 원래 그런 얘기를 잘 못 한다”고 했다.
작품을 구상한 건 팬데믹이 휩쓸던 2021년 8월, 그가 사는 부암동 언저리였다. “혼자 있었고, 산책하는 일 빼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16년을 살며 부대끼던 진돗개가 죽었는데 너무 헛헛하더군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관계가 단절되던 고립무원의 시절이었다. “아무 생각 안 하려고 북악산, 인왕산, 안산을 빙빙 걷고 또 걸었어요.” 이번 연극에도 늙어 죽어가는 개 이야기가 나온다.
“가만가만 내부를 응시하고 들여다보는 작품이거든요. 깨끗하고 진솔한 연기를 하시는 손숙 선생님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쓰면서 배우 손숙을 염두에 뒀다고 했다. “신들린 연기, 압도적 에너지가 아니라 심심, 담담하고 차분하면서 절제하는 연기를 하는 분이죠. 이런 연기도 그 자체로 귀합니다.” 그는 “격정적 정서나 격렬한 갈등이 아니라 독백과 나레이팅 위주의 작품이라 손숙 배우에게서 담담하고 편안한 말들이 흘러나올 때 자연스러워지더라”고 했다.
그의 글에선 온갖 의성어, 의태어가 리듬감을 살리고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육성에 가까운 살아있는 말들’도 편애한다. “한때는 살아 있는 말들을 수집하려고 술자리 등 사람들 모이는 곳에 가서 귀 기울여 유심히 듣기도 했어요. 똑같은 말인데 말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더군요.” 연극 ‘벽속의 요정’을 각색할 때는 여름 내내 국회도서관에 틀어박혀 노인들의 구술 채록을 들추고 잡지를 열람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생기가 있고 살아 꿈틀거린다. 그는 의미 전달에 더해 말들이 부수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말이란 게 부질없는 거잖아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 이외에 언어가 지닌 감각적 특성을 너무 소홀하게 다뤄요.” 그는 “말을 아름답고 듣기 좋게 쓰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가 음악과 관련한 글쓰기에 능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시적 운율이 넘실대는 그의 대본들을 떠올리며 “혹시 몰래 써둔 시가 있거나 앞으로 시를 쓸 생각은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시를 좋아하고 자주 읽는데 쓰진 않았어요. 동화가 재밌더군요.” 지난 3월엔 어린이를 위한 동화 희곡 ‘훨훨 올라간다’를 펴냈다. 내년쯤 노래극으로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이야기를 다뤄온 그가 소설을 쓰지 않은 이유도 궁금했다. “희곡은 화자를 객관화시켜 여러 목소리와 시선들 사이로 숨을 수가 있어요.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글 쓰는 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내가 견디지 못해요.” 그는 “내 얘길 하는 게 쑥스러워 희곡을 쓰게 된 것”이라며 “언젠가 소설을 써볼 생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속도감 있게 대본을 쓰는 극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연극계에선 시간에 쫓기면 배삼식에게 맡기면 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3월의 눈’은 1주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번 작품 ‘토카타’도 10일 만에 다 썼다. “하루에 쓸 원고량을 에이포(A4) 용지 5장 정도로 정해두고 꾸역꾸역 씁니다. 고치고 새로 쓰더라도 무조건 하루 분량을 채워요. 늦어도 20일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지루해서 못 견뎌요. 2주 정도는 필수적인 일들 외에 글쓰기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그 전에 자료 조사는 다 해둔다는 전제에서다. 그는 “글이란 게 중후반을 넘어가면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때쯤이면 글이 내달리기 시작한다”며 웃었다.
“그때 너는 내게서 뒤돌아 앉아 있었고/ 무언가에 골몰해 있었고/ 그 방심의 뒤편에 너의 머리칼이 있었지~ 너의 머리카락, 그 나른한 물결 속에서/미분화 상태의 유생들처럼 부유하며/ 몸을 부비며 서로를 더듬고 또 더듬으며/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렸지.”(토카타 중)
“아름다운 것은 늘 안타깝고, 오직 이 안타까움만이 영영 돌고 돌아온다”고 믿는 극작가 배삼식. 그의 글쓰기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한국어를 풍요롭게 할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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