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최고이자 최악이던 시기, 21세기를 배태한 근기원” [김용출의 한권의책]
위기와 불안이 만연한 요즘, 많은 이들이나 각종 대중문화 장르가 ‘좋았던 그 시절’로서 가장 빈번히 불러내고 소환하는 과거는 1990년대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는 억압하는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으로 들끓었던 1980년대를 지나서 드디어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문화를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았던 그 시절’로서만 1990년대를 바라보는 것은 반쪽짜리라고, 사회학자인 윤여일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지적한다. 1990년대야말로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들의 ‘근(近)기원’이라고 역설한다.
1990년대 중반, 경제적 자유주의와 소비주의가 사회 전반과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급격한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질서가 전면화했다. 노동과 고용이 유연화했지만, 비정규직이 보편화했고, 바야흐로 위기와 불안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로 변했다.
이 시기는 문화적으론 영화와 음악 등 대중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면서 지금의 한류와 K컬처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십대들이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주류로 올라섰고, 1990년대를 대학에서 보낸 X세대가 부상되면서 세대론도 본격화했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빠르게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등의 포스트주의 이론으로 대체됐다. 제1차 페미니즘 붐이 일었고, 여성적 글쓰기가 곳곳에서 모색됐다. 1991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충격을 주면서 환경문제와 생태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1990년대는 1987년 이후 변화에 대한 희망과 함께 역동적으로 시작됐으나 중반을 지나면서는 전환기를 통과할 때 생겨나는 들뜬 감정과 막연한 불안감이 교차했다. 세기말에 이르면서는 어떤 장구한 시간대의 끝자락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퍼졌다.”(34쪽)
윤 교수는 이에 따라 책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돌베개)에서 근본적 변화의 시기이자 현재의 한국 사회의 큰 틀을 주조한 1990년대의 지성사를 국가, 통제, 디지털, 위기, 문화, 문학, 사상, 진보, 대중, 세대, 지식인, 여성, 생태 등 13개 주제로 조감했다. 이를 통해서 2000년대 이후 지금으로 이어지는 현대 정신사의 의미와 그 향방을 전망하려고 시도했다. “이 책은 1990년대 사회적 변동을 고찰하고 정신적 행방을 유산화할 것이다. 그렇게 1990년대에서 지금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을 건져내고자 할 것이다.”(11쪽)
저자가 1990년대 한국 사회의 변동을 조망하고 정신적 행방을 유산화하기 위해서 연대적 사건 기록과 해석뿐만 아니라 고민과 모색까지 함께 담긴 주요 잡지들의 기획과 특집을 분석하는 방법을 택했다. 1990년대는 담론 생산과 유통에서 무엇보다 잡지가 큰 역할을 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3개 주제별로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1990년대 지형도를 그린 뒤, 이전 시대와의 비교하거나 현재에 미치는 영향력을 탐색하면서 분석을 심화해 나간다.
IMF 체제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대목은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를 민주화를 통해서 정치적 자유화를, 대중 소비를 통해서 경제적 자유화를 이룬 것으로 파악한 그는 IMF 사태가 두 영역간의 관계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IMF 경제위기는 경제가 사회를 규율하는 문법으로 자리 잡고, 국가 권력이 으뜸가는 사회적 주재자 자리를 시장 권력에 넘겨주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85쪽)
개인적 관심사인 문학 분야 역시 그럴 듯한 분석이었다. 문학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고 본 그는 작가들이 이전의 민족적이고 민중주의적 문학과 달리 구체적인 개인과 내면, 일상을 담는 작품 경향으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이 시기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대중소설들이 출판 시장을 휩쓸었다. 특히 민족문학론의 거점인 『창작과비평』,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문학과사회』와 더불어, 작가와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문학동네』가 등장해 문학주의를 선도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창작에서 이미지와 기호의 유희가 우위에 서면서 서사성이 약화됐고, 거대담론이 제거한 일상성을 복원하면서 거꾸로 거대 담론을 퇴출시켜버렸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고 살폈다.
책은 주제와 카테고리가 많아서 다소 산만하게 펼쳐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사회를 둘러싼 주요 분야의 구조와 위기의 체계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가히, 쉽게 그리고 새롭게 읽을 수 있는 1990년대 지성사가 될 수 있겠다. 혹시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을 수도.
“1990년대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 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1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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