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곳 나스닥 보낸 전설의 VC "기술 대신 이것 봤다···정해둔 원칙조차 깨야” [정혜진의 Whynot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2023. 8. 1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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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조원 운용하는 NEA 스콧 샌델 CEO
세일즈포스, 로빈후드, 웹엑스 등 투자
10% 향상 아닌 10배, 100배 본다
넷플릭스 투자 실패 교훈 되새겨
세일즈포스 투자에 적용해 성공
[서울경제]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먼로파크 샌드힐로드 2855번지. 간판조차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2층짜리 건물이지만 40년간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스타트업들이 ‘넥스트 구글’ ‘넥스트 테슬라’를 꿈꾸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곳이다. 이곳에는 지난달 기준 총투자운용금액(AUM)이 240억 달러(약 31조원)에 달하는 실리콘밸리 최대 벤처캐피털(VC)인 NEA(New Enterprise Associate)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VC 업계의 전체 AUM 규모가 갓 50조 원을 넘어선 것을 고려하면 VC 한 곳이 우리나라 전체 VC 업계의 60%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하는 수준이다.

실리콘밸리의 앤드리슨호로위츠·세쿼이아캐피털과 함께 3대 VC로 꼽히는 NEA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의 시초라 할 세일즈포스에 초기 투자했고 화상회의 솔루션으로 시스코에 32억 달러에 인수된 웹엑스도 일찍이 가능성을 알아보며 신기술 감별사로 명성을 굳혔다. 이 외에 미국 최대 증권 앱 로빈후드(2015년), 클라우드 보안 플랫폼 클라우드플레어(2010년), 소셜커머스 그루폰(2008년) 등에도 투자했다.

스콧 샌델 NEA 최고경영자(CEO)는 서울경제신문과 창간 인터뷰를 통해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주는 가치를 가려낸 것이 성공의 노하우”라며 “강력한 가치를 줄 때 소비자들이 반응하는데 생성형 AI는 소비자 측면에서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샌델 CEO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또 그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활용 면에서 진짜 가치를 줄 수 있으려면 정교한 데이터셋이 필요한데 나날이 데이터셋이 좋아지고 있다”며 “처음에는 ‘기성품 AI’를 쓰다가도 저마다의 기술과 데이터셋으로 맞춤형으로 발전하면 생성형 AI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짚었다.

샌델 CEO는 ‘강력한 가치 제안(strong value proposition)’이라는 말을 16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는 앞선 대단한 기술인데도 이용자들에게 강력한 가치를 주지 못하는 것이 많다”며 “생산성을 10% 높이는 소프트웨어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10배·100배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는 제품을 본다”고 강조했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가능성을 ‘무한한 상승세(unbounded upside)’로 간주하고 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그의 일이다.

난독증으로 서류 대신 사람 팠다

기업을 볼 때 기술 너머의 본질을 파고든 데는 평생의 결핍이 큰 동력이 됐다. 샌델 CEO는 다트머스대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첫 직장인 마이크로소프트(MS)에 입사해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PC 운영체제 윈도95의 프로덕트매니저를 맡았다. 이후 1996년 NEA에서 VC심사역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VC들이 일하는 방식으로는 차별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학습 장애의 하나인 난독증(읽기 장애)을 심하게 겪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샌델 CEO는 “포기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읽어서 공부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 배우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며 “사업 모델 요약(executive summary)과 창업자들의 이력 단 두 가지만 팠다”고 전했다.

질문이 달라야 했다. ‘당신이 이 비즈니스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는 그의 첫 질문이었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기존의 삶을 버리고 창업에 뛰어든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고 그곳에 해결할 문제와 기회 요인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어떻게 제품이나 기술로 문제를 풀 것인가’에 이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샌델 CEO는 “이 질문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이용자들이 이 제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할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창업자들이 그 사업에 얼마나 리스크를 베팅할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본이 투입되는지는 그다음 문제라는 설명이다. 이후 2016년 CEO에 취임해 16~18VGE펀드를 연달아 출범시켰고 전체 AUM 규모를 80% 가까이 키웠다.

달라진 실리콘밸리 게임 상

실리콘밸리는 올해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스타트업 생태계가 크게 위축되는 경험을 했다. 이를 두고 샌델 CEO는 “실리콘밸리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주제가 ‘최대한 빨리 성장하라’에서 ‘가지고 있는 돈의 한도에서 효과적으로 성장하라’로 바뀌었다”고 짚었다. 그는 “이전에는 수익 없이 성장하는 것으로 창업자들이 페널티를 받지 않았지만 금리 인상과 벤처펀딩 위축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출혈 경쟁의 대표 주자였던 우버가 2분기 2009년 창업 이후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활황일 때는 기업가치가 인플레이션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 생태계가 위축되는 딜레마 간의 균형을 묻자 적정한 기업가치를 가진 성장주를 찾아낸다는 의미의 ‘GARP(Growth at a Reasonable Price) 전략’을 언급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무한한 상승세’를 보이는 기업인 경우 당시의 기업가치 평가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3~5배 성장이 아닌 50배·10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뤄줄 그런 기업이다. 하지만 동시에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율은 철저히 50대50으로 가져간다. 그는 “리스크가 큰 초기 단계에 50%를 투자하지만 이들 중 후기 시리즈까지 투자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오직 5~10%가량의 기업만 후기 단계까지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27년차 셰르파”

본사 출입문 옆 복도에서는 별다른 장식품 없이 빨강·노랑·초록·파랑 등의 색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하던 샌델 CEO는 기자가 동양적인 느낌의 2m 정도 되는 사진에 시선을 돌리자 이 사진의 의미를 대답하기 전에는 이 건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농담을 던졌다. ‘인피니트 비트윈스(Infinite Beteweens)’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네팔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앞의 ‘소원 깃발’을 찍은 것이다. 히말라야 등정을 앞둔 이들이 무사히 귀환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창업 여정에 나서는 창업자들을 빗댔다. 샌델 CEO는 “수많은 창업자들이 탐험가의 마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 우리도 역할이 있다”며 자신의 역할을 이름 없는 셰르파(등반 안내인)라고 힘줘 말하며 미소 지었다.

40년 역사 동안 NEA가 발굴하고 투자한 스타트업 중 270곳이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해 오프닝벨을 울렸다. 화상회의 솔루션 웹엑스나 클라우드서비스 타블로처럼 다른 기업에 인수된 사례도 450건에 달한다. 역사와 업적이 나란히 성장하는 NEA의 성공 이유로 클라우드 보안 플랫폼 ‘클라우드플레어'의 최고경영자(CEO)인 매슈 프린스는 ‘NEA는 커다란 도전을 무릅쓰고 창업자들이 대담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한다’는 점을 꼽았다.

270곳 상장에도 유튜브, 넷플릭스 투자 실패 뼈아파

27년간 셰르파로 나섰던 그에게 잊지 못할 투자의 순간을 묻고 싶었다. 이 질문에 그는 실패의 순간들을 꼽았다. 2005년 그가 휴가 중이었을 때 절친한 지인이자 연쇄 창업자인 짐 클라크 넷스케이프 창업자가 연락을 해왔다. 사위(채드 헐리)가 창업을 했는데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비서에게 창업자와 미팅을 잡으라고 했지만 휴가 뒤에 이를 깜빡했다. 이후 경쟁사인 세쿼이아캐피털이 유튜브라는 서비스에 투자했다는 기사가 떴다. 이후 2007년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되자 세쿼이아캐피털은 1100만 달러의 투자금으로 44배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뼈아픈 실수였다”며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두 번째 실패는 더 아팠다. 1998년 한 친구가 “투자를 받고 싶은데 이왕이면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친구가 내건 기업가치는 5500만 달러에 달했다. 샌델 CEO는 “너무 괜찮은 사업 모델이었고 온라인으로 갈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면서도 우리가 생각한 금액의 두 배였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당시 투자를 접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 친구는 현재 시가총액이 1940억 달러에 달하는 넷플릭스를 창업한 리드 헤이스팅스였다. 기업가치가 3880배나 성장한 것이다. 샌델 CEO는 “아주 특별한 사업 모델이라면 기존의 가치 책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전했다. 이후 실패로 배운 교훈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002년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창업자가 투자 의향을 타진하면서 ‘절대로 VC들 앞에서 피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자 항상 파트너가 입회한 가운데 피칭으로 투자를 결정한다는 원칙을 깼다. 그는 “이틀 안에 모든 파트너를 일대일로 피칭하면서 설득했다”며 “회사가 아주 특별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때로는 정해둔 원칙을 깰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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