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인간에 관한 세련된 풍자와 질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단편은 물론이고 장편 '잉투기' '가려진 시간'으로 탄탄한 내공을 드러냈던 엄태화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디스토피아를 자신이 쌓아온 내공을 눌러 담아 세련된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 온 세상이 무너졌지만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며 시커먼 동공을 드러내는 과정을 풍자와 반어, 은유로 완성했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대지진 그리고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오직 황궁 아파트만은 그대로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자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된 그들은 새로운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선 채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덕분에 지옥 같은 바깥세상과 달리 주민들에게 황궁 아파트는 더없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유토피아'다. 하지만 끝이 없는 생존의 위기 속 그들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한 갈등이 시작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시작부터 영화의 주요 무대인 '아파트'에 담긴 애욕의 역사를 보여준다. 공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내 한 몸 누일 보금자리인 '집'은 언젠가부터 부와 욕망의 상징까지 담아내게 됐다. 그러한 아파트가 갖는 이중성에 대한 역사를 훑으면서 앞으로 아파트에서 벌어질 이야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한다. 이 애욕의 역사는 늘 인간 내부에 도사리는 양면성의 역사다.
영화는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서 '생존'과 '우리', 다른 말로 '공동체'라는 키워드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의 양면을 들춰내는 시도를 한다. 생존을 위해 뭉친 '우리'라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사람'이라 하면서 다른 공동체와 철저하게 분리한다. 황궁 아파트 밖 개인들은 그저 '바퀴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를 위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우리'를 배제하려는 말과 행동들은 폐허 속에 살아남은 자들이 어떻게 '인간'이란 단어를 '지옥'으로 뒤바꾸는지 보여준다.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선택받은 사람들'과 '평범했던 사람들'이다. 인간을 방역해서 박멸해야 할 바퀴벌레로 대하는 인간들조차 '평범한' 사람들이다. 지금도 눈을 돌리면 만날 수 있는,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황궁 아파트를 지키고자 한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지극히 인간적일 수 있는 사람들,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양극단의 인간성을 의미한다.
인간이라는 존엄을 지켜나가며 인간성을 잃지 않고 연대하는 인간 그리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욕망, 여기서는 '생존'이라는 욕망을 위해서라면 나 혹은 내가 속한 울타리만을 우선하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황궁 아파트 안에서 끊임없이 맞부딪힌다. '선택받은 자'라는 집단의 구호가 그 집단 속에 있는 개개인을 변하게 만드는 과정은 익숙한 풍경이다. '공동체'라는 이름은 현실에서도 그러하듯이 항상 '선'(善)의 얼굴을 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어두운 욕망을 드러낸 집합체는 결국 그 안에 속한 개인을 비슷한 색으로 물들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영탁이다. 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쭈뼛거리던 김영탁이 황궁 아파트의 대표가 되고, 그러한 위치와 그 '위치'를 향한 사람들의 눈빛과 요구에 점점 '영웅'처럼 되어간다. 집단의 욕망과 이데올로기가 김영탁의 어두운 마음을 바깥으로 꺼내는 과정은 집단의 이념이 개개인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설명한다.
김영탁을 비롯해 1004호, 부동산 사장, 부녀회장 등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선악 혹은 옳고 그름을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고 위험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한 면들이 하나하나 극단적으로 드러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실제 극한의 상황에 처한다면 때로는 1004호, 때로는 영탁이나 민성, 부녀회장 그리고 어쩌면 명화가 될 수 있다.
영탁이 평범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면, 명화는 그 반대편에 있는 인간성의 상징이다. 누군가는 영탁보다 명화를 '빌런' 내지 '민폐 캐릭터'로 여길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인 명화를 빌런이라고 할 때, 과연 '생존'이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버릴 수 있고 잊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갑갑하리만치 인간성과 이타심을 유지하는 명화를 '빌런'이라고 바라보는 순간, 어쩌면 '내가 만약 저 상황이라면'이라는 가정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명화는 영화의 메신저인 동시에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을 향한 질문지이자 시험이다. 무너진 인간성, 상실한 인류애 속 인간의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명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우리만의 답을 가지게 된 건지도 모른다.
포스터에서부터 황궁 아파트 거주 20년 차의 내공을 보인 이병헌은 이번에도 완벽하게 김영탁으로 변신해 스크린을 장악한다. 이병헌의 모든 것을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마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박서준과 박보영 역시 그동안 보여 온 캐릭터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결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를 탄탄하게 받쳐준다. 이들 외에 여러 배우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넘치게 소화하며 극의 몰입을 높인다.
엄태화 감독은 첫 대작 연출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약조절과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며 매끄럽게 만들었다. 한없이 어둡고 절망적일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들 사이사이로 아이러니한 웃음의 요소를 넣으며 절묘하게 긴장을 조율해 나간다. 상징과 은유들 역시 가득해서 이를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 톺아보는 재미도 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과 광고 영상 같은 시퀀스,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을 포착해 낸 클로즈업 등이 이미 단단한 내공을 쌓아 장편으로 온 감독이라는 걸 보여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엔딩을 보는 순간 엄태화 감독의 다음 작품이 보고 싶어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넘어야 할 산은 '여름'이라는 계절적인 장벽이다. 보통 여름 영화에 원하는 쾌감과는 거리가 멀지만 현실에 대한 은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질문이 블랙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잘 어우러져 있다. 조금은 색다른 여름 극장가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그리고 잘 만든 한국형 블랙코미디를 만나고 싶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 될 것이다.
130분 상영, 8월 9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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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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