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 민주화 헌신한 재일동포들에게 ‘반국가단체’라니 [책&생각]
야만의 시간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
김종철 지음 | 진실의힘 | 1만9000원
민주화는 단지 한국에 있던 사람들의 힘으로만 일궈낸 것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재외동포들이 있었고, 굴곡진 현대사의 영향으로 일본 땅에 머무르게 된 재일동포들의 헌신은 특히나 결정적이었다. 한국계 재일동포 단체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독재정권은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국제적으로 알린 한통련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틈만 나면 이들을 간첩으로 몰다가 끝내 ‘반국가단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씌웠다.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니 한통련이 탄압받은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라 여겨질지 모르지만, 한통련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간첩 조작 등 과거 공안 세력이 벌인 공작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한통련에 씌워진 오명은 아직 그대로다. 한국 국적임에도 한통련 회원들은 한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고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 2012년부터 재외동포 투표권이 인정됐지만, 여권이 없는 한통련 회원들은 투표도 할 수 없다.
‘야만의 시간’은 한통련을 깊이 취재해온 김종철 전 한겨레 기자가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부제)을 조명한 책이다. 민단 개혁파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앞장섰던 재일동포들의 헌신, 이들을 간첩과 반국가단체로 몰았던 공안 세력의 작당, 민주화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 등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1973년 8월15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본부로 시작한 한통련은 올해로 출범 50년을 맞는다.
해방 직후 재일동포 사회는 남한 지지자는 민단, 북한 지지자는 총련으로 갈렸다. 초기에 민단은 자율적·민주적으로 운영됐고 이승만 정부의 ‘기민정책’(재일동포를 방치한 정책)을 비판하는 등 본국 정부나 주일 한국공관으로부터도 독립성을 가졌으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며 박정희 정부에 종속되는 길을 밟았다. 김재화·곽동의·배동호 등 개혁파가 반발했으나, 박정희 정부는 선거에까지 개입하며 민단을 장악했고 개혁파 인사들을 ‘북한·총련과 거래하는 불순 세력’으로 만들어 내몰았다. 개혁파는 유신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쫓겨 망명 생활을 하던 정치인 김대중과 결합해, 1973년 한통련의 전신 한민통을 출범시키게 된다. 탄압의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는 김대중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민통은 총련과 엄격하게 선을 긋고 통일 사업보다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더 집중하는, “선민주화, 후통일” 노선을 택했다. 한민통 출범을 코앞에 두고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켰고, 그를 구출하기 위한 한민통의 전방위적인 노력은 일본의 시민사회를 움직인 데 이어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세계적인 주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한 박정희 정권에게, 한민통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의 국제화’는 큰 부담이었다.
이를 제압할 독재정권의 무기는 공안 세력의 ‘용공 조작’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할 때마다 만들어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 중 하나”가 기나긴 한민통 박해의 출발점이 됐다. 보안사는 1977년 재일동포 청년 김정사가 북한의 지령을 따르는 ‘공작지도원’ 임계성의 지령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몰았고, 검찰은 공소장에 임계성의 배후로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이라 규정하는 내용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근거라곤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정낙중)가 작성한 문서(영사증명서) 한 장과 ‘자수 간첩’이라는 윤효동의 막연한 증언뿐이었는데도, 법원(1심 재판장 허정훈)은 공소장을 그대로 베낀 판결문으로 ‘한민통=반국가단체’ 낙인을 찍었다. 이처럼 한민통을 어영부영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독재정권은 국내외 민주화운동을 옥죄었고, 공안 세력은 이를 활용해 또 다른 ‘불순 세력 만들기’를 수월하게 이어갔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역시 이를 활용해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1997년 권력 교체가 이뤄진 뒤 수많은 ‘과거사’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그러나 한통련에 대해서는 여태 무엇 하나 바로잡힌 것이 없다. 노무현 정부 때 한통련 인사들이 정부의 결정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고국 땅을 밟는 등 ‘사실상의 복권’ 조처가 있긴 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입국이 어려워지는 등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반국가단체 멍에를 벗겨줄 핵심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08년에야 비로소 한통련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가, 이명박 정부의 영향으로 ‘규명 거부’를 결정해버렸다. 한통련은 2020년 출범한 2기 진화위에 다시 진실을 밝혀달라 신청해둔 상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영향으로 “편향적인 이념과 과거사를 왜곡하는 인사들이 다수가 된” 진화위가 제대로 진실을 밝혀낼지 미지수다.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2004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2011년 김정사 사건 재심에서 법원은 당사자들의 무혐의를 판결했으나, 사건과 긴밀히 얽혀 있는 한통련에 대한 판단만은 끝내 외면했다.
지은이는 이렇게 일갈한다. “한통련 사건은 독재정권 시절에 있었던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다. 일본에 사는 그들의 일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우리의 문제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한 이들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반국가단체라는 붉은 딱지를 붙인 것은 독재자의 한국 정부였으나, 지금까지 그들을 각종 차별 속에 방치해두고 있는 것은 민주화된 한국 사회다.”
재일동포 임병택이 젊은 시절 했다는 다짐은 우리 역사에서 한통련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되새기게 한다. “재일동포 청년들의 고민은 민족성에 있으므로 그 근원인 조국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조국의 부조리한 정치구조가 만연하고, 동포 민중이 고생하고 있는 정세를 묵인해야 하는 것일까? 앞으로의 내 한국 민주화운동에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것은 그때 대처하면 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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