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가 지상에 던지는 질문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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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가 '시다의 꿈'을 시로 발설한 지 올해 40년이 됐다.
유현아의 시집은 결국 노동시의 소풍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자도, 노동시도 지상에서의 소풍은 다하고 만 걸까.
내년이면 최초 노동자 시인 박영근(1958~2006,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시인)과 가장 대중적인 노동시를 개척했던 박노해(66)가 첫 시집을 낸 지, 그리고 함께 계보를 구축한 백무산(68)이 첫 시를 발표한 지 40주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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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유현아 지음 l 창비 l 1만원
박노해가 ‘시다의 꿈’을 시로 발설한 지 올해 40년이 됐다. 1983년 스무살 시다의 경우였을 거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시다의 꿈’ 앞부분)
가정하건대, 2023년 예순살 시다의 경우이겠다.
“아직도 토요일에 일하는 곳이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어요// 계절을 앞서가며 미싱을 밟지만 생활은 계절을 앞서가지 못했지요// 어느 계절에나 계절 앞에 선 그 사람이 있어요/ 숙녀복 만들 때에도, 신사복 만들 때에도, 어린이복 만들 때에도/ 익숙한 손가락은 미싱 바늘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였어요”
당대 노동을 증언 중인 시인 유현아의 ‘토요일에도 일해요’의 앞부분이다. 미싱은 죄 없다, 한결같다. 꿈처럼 나아간다, 계절도 불러온다. 40년 전엔 다만, 시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꿈을 꿨던 모양이다.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새벽별 빛나다”(‘시다의 꿈’ 뒷부분)
되레 지금 ‘노동시’는 끝맺음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일요일이 즐겁기 위해 토요일에 일해요,라고 대답했어요/ 끝에는 끝이 없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공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 있어 안 보일 뿐이에요/ 익숙하지 않은 토요일의 무게감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씩씩하게 명랑하게 아픔을 이야기하는 그의 입 앞에서”(‘토요일에도 일해요’ 뒷부분)
지상에서의 종결이 난망한 탓인가, 더는 갈 데 없이 고공농성인 자들에 시인의 시선은 닿는다.
“꼭대기로 소풍 가요/ 우리가 딛고 걷는 바닥은 아무 데도 없거든요/ 저기 교묘하게 죽어 있는 바닥들이 보이잖아요/ 우리의 바닥들은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위로 올라가죠// 이제 혁명의 노래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투쟁의 기다림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죽음의 상징 따위도 위로 올려 보내요/ 정교하지 못한 거짓말도 위로 올려 보내요/…”(‘소풍’ 부분)
너도나도 올라 어울리는 거대한 광장을 이뤘으니, 그 좁은 꼭대기의 풍경이 소풍이 아닐 까닭이 없다. 다만 이런 소풍은 필히 대가를 요구받는다. 시대로라면 “위로 위로 올라가다보면 그곳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기다리고 있”는 노동자의 소풍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말 전남 광양제철소 앞 고공농성 중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주저앉고 망루에서 끌려 내려온 노동자의 핏빛 소풍이랄까.
“…/ 올라간 것들은 이제 내려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의문투성이 위로가 필요한 때/ 아니면 바닥의 가장자리가 닳을 즈음 내려올지도// 그러니 우리 이제 바닥을 치고 꼭대기로 소풍 가요”
유현아의 시집은 지상에서 종결되지 않았으므로 지상에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품는다. 부제와 내막만 다를 뿐 동일한 제목의 12편 ‘질문들’이 그것이다.
“오늘도 침묵이 침묵처럼 번지고 있다”는 부제 ‘광장에서’의 질문들, “매뉴얼대로 감점을 먹었다 배부르다 그러므로 점심값이 굳었다” 그러나 “퇴근 시간은 매뉴얼에 없다 그러므로 저녁 시간은 한없이 되풀이된다”는 ‘매뉴얼 스토리’의 질문들, “벽이 최후의 저항자처럼 느닷없이 사라지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울음은/ 벽이 있던 골목 언저리에서 서성일 것이다”는 ‘을지로 3가’의 질문들….
질문이 되어 맞섰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손을 움켜쥐고 병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 애썼지/ 오로라가 날아다니는 병 속 세계를 펼치고 싶었지/…/ 너는 병맛 스타일로 세계를 제패하는 거지/…// 병맛엔 어떤 힘이 있는 거니/ 왜곡된 청구서 속에서 너는 있는 힘을 다해/ 마셨던 노래를 화염병처럼 투척하는 거지/ 그러면 파바바박 노래가 터지는 거지/…”(‘질문들-병맛을 위한 찬가’ 부분)
이것은 동지들의 뒤풀이 소회도, 내일치 다짐도 아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병맛인 지상계에서,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동지들에 대한 추념으로 헛헛한 제 마음을 묻는 질문일 뿐이다.
사라진 것이 어디 그뿐인가.
“오래전 이곳엔 숨어 있을 곳이 많았다/ 다락이 있었다/ 창고가 있었다/ 지하가 있었다/ 골목이 있었다/ 단골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다/ 거룩이 있었다/ 네가 있었다”(‘식상’) 이젠 “어둠이 각질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동네의 이방인처럼 버스를 기다린다”(‘어쩌다 버스 정류장’, 각 부분)
재개발로 거처가, 동네가 사라지고, 스크럼을 짜던 이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던 이가 사라지고, 그들의 노동시가 사라지고, 노동시도 읽던 이가 사라지는 시대, 시집이야말로 디딜 바닥이 없다. 유현아의 시집은 결국 노동시의 소풍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우리의 노동은 소중하지 않았다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모든 게 결국은 햇빛 때문이라고/ 모두가 동의했다//…// 듣는 사람이 사라진 사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주 긴 밤이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말을 뿌리쳤다/…// 끝이 아니라 암전이었다”(‘질문들-숨소리를 따라가던’ 부분)
노동자도, 노동시도 지상에서의 소풍은 다하고 만 걸까. 이 시집엔 세련됨이나 기발함이 없다. 시적 낙관이 없다. 쓰다 만 시처럼 어떤 노래는 맥없다. 시가 노동자보다 세련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저 보고들은 바, 쓰이다 만 노동자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의 추문이 겨우 드러나는 방식이고, 유현아는 “가로등이 없는 고속도로를 들어서면/ 밤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구체적인 밤’ 부분)
내년이면 최초 노동자 시인 박영근(1958~2006,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시인)과 가장 대중적인 노동시를 개척했던 박노해(66)가 첫 시집을 낸 지, 그리고 함께 계보를 구축한 백무산(68)이 첫 시를 발표한 지 40주년이 된다. 유현아 시인은 2006년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해,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2013), 청소년시집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2020) 등을 냈다. 노동시는 계속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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