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동물 동성애 연구서 인간 선입견을 들추다
배게밀 문제작 출간 24년 만에 국내 소개
“동물 동성애 행동은 이성애만큼 보편적”
변화하는 생물학 패러다임도 함께 다뤄
생물학적 풍요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브루스 배게밀 지음, 이성민 옮김 l 히포크라테스 l 4만3000원
“동물 사회에도 동성애가 있나요?” 이 질문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동물 행동학자로 평생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다. 최 교수는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에서 이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네~ 있습니다. 동물 사회에서 동성애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최 교수의 대답만큼이나 명료하고 명쾌하게, 동물의 동성애에 대해 과학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책이 있다. 바로 캐나다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브루스 배게밀이 쓴 ‘생물학적 풍요’이다. 13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동물 섹슈얼리티에 대한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만큼 동물 동성애에 대해 폭넓고 깊게 다룬다. 1999년에 출간된 이 책은 미국에서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던 ‘소도미법’ 폐지 판결(2003년)과 인도 대법원의 동성애 비범죄화 판결(2018)에도 인용될 만큼 논거가 탄탄하다.
다른 나라에서 이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이 책을 뒤늦게라도 국내 독자와 연결해준 출판사는 과학 전문 출판사 동아시아다. 동아시아는 의치약·생명공학 브랜드인 ‘히포크라테스’를 새로 만들고 첫 책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기획과 책임 편집을 맡은 김선형씨는 이 책이 이제야 국내 출간된 배경에 대해 “1999년 당시의 기획자나 편집자들에게는 이 책이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 분량도 많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판매는 보장되지 않으니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문화 지형에서 동물의 동성애에 대한 명백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도 우리 사회가 과연 마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2017년 대선 토론회에서조차 대통령 후보자들이 성적 다양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했으니 말이다. 김 편집자는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과학 전문 출판사로서 공적 책임감을 갖고 이 정도의 책은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책은 크게 1부 ‘폴리섹슈얼, 폴리젠더의 세계’와 2부 ‘경이로운 동물 세계’로 구성됐다. 1부에서 저자는 동물의 동성애에 대한 정의와 분류, 빈도 등을 다룬 뒤, 지난 200여년 동안 진행된 동물 동성애 연구를 찬찬히 톺아본다. 배게밀은 동성애에 대한 선입견과 혐오를 갖고 있는 동물학자들이 연구에 그 감정을 투사해 ‘동물의 동성애’를 어떤 방식으로 왜곡하는지 살핀 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동물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역사는 거의 끝없는 선입견의 연속, 부정적인 해석이나 합리화, 부적절한 표현과 누락, 심지어 동성애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나 공포의 역사였다.”
과학자들은 ‘동물 동성애’를 표현할 때 ‘이상한, 기괴한, 비뚤어진, 변태적인, 일탈적인, 비정상적인’과 같은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동물 동성애 관련 논문 제목을 살펴보면, ‘수컷 딱정벌레의 변태적인 성 행동’ ‘남아프리카타조의 일탈적인 성행동’ 등과 같은 제목이 쉽게 눈에 띈다. 수컷 사자 간의 구애와 마운팅은 ‘비정상적 성적 집착’으로 해석되고, 같은 성 활동은 다른 증거가 없다면 다른 동물들에게 ‘강제’되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배게밀은 동물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서술했을까? 저자는 2부에서 20세기 후반까지 과학적으로 문서화한 450여 종의 동물 동성애 사례 가운데, 190여 종의 포유류 및 조류 사례와,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의 동성애 목록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해 보여준다. 이 중 기타 포유류 부분에서 사자와 치타를 다루고 있는데, 그의 서술 방식은 매우 건조하고 사실적이다. 책에 따르면, 사자의 짝짓기 시스템은 난혼제이거나 일부다처제다. 대개 수컷과 암컷은 여러 파트너와 짝짓기를 하고, 장기적인 이성애 유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짝을 이룬 수사자끼리 동성애 활동을 할 때는 흔히 엄청난 횟수의 애정 활동을 먼저 한다. 상호 머리 문지르기, 다른 수컷에게 엉덩이 보여주기, 서로 몸을 미끄러뜨리거나 문지르기, 상대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돌기, 페니스를 발기시킨 채 등을 대고 구르기 등이 포함된다. 수사자의 동성애 마운팅은 전체 마운팅 사례의 최대 8%까지 차지한다.
있는 그대로 관찰해 기록한 내용을 읽다 보면, 독자들도 동물 동성애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흔히 인간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동성애가 자연스럽지 않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자연스러움’ 역시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임을 마주하게 된다.
배게밀의 책은 동물 동성애에 관한 사실 나열에 그치지 않고 지난 20년 동안 변화하고 있는 생물학의 패러다임도 함께 다룬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다윈주의 진화론과 카오스 이론 등이 등장하면서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과 같은 진화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재검토되거나 버려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경제 이론을 생물학과 융합해 ‘생물학적 풍요’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바타유에 따르면, 모든 유기체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는데, 창조(출산)하고 파괴하는 모든 활동 등을 통해 과잉 에너지를 소비하거나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과잉과 풍요는 생물학적 시스템의 주요 원동력이 된다. 배게밀은 바타유의 논리를 빌려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생물계의 풍요를 나타내는 여러 표현 중 하나라고 결론짓는다. 동물 동성애에 관한 전무후무한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궁금해진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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