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적 대화가 ‘아이히만의 무사유’를 깨뜨린다 [책&생각]
칸트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l 한길사 l 2만8000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렌트의 정치철학 저작은 여러 종 있지만 ‘칸트의 정치철학’은 그중에서도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의 마지막을 이루는 저작이다. 이 책은 20여년 전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바 있는데, 제목을 바꾸고 번역을 수정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나왔다.
‘칸트의 정치철학’은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 이론’을 담은 책이지만 저자가 직접 완성한 저작은 아니다. 아렌트는 애초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총괄하는 저작을 ‘정신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기획하고 ‘사유’(Thinking), ‘의지’(Willing), ‘판단’(Judging)을 주제로 삼아 3부작으로 써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렌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기획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원고가 완성돼 있었던 ‘사유’와 ‘의지’는 아렌트 사후에 책으로 출간됐지만, 제3부를 이룰 ‘판단’은 집필을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도 아렌트의 ‘판단 이론’의 윤곽을 알려주는 다른 원고들이 남아 있었는데, 1970년 아렌트가 뉴욕의 뉴스쿨 대학원에서 행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와 ‘칸트 판단력 비판 세미나’의 노트였다. 아렌트의 조교를 지낸 로널드 베이너가 이 두 강의 원고를 엮고 자신의 긴 해설 논문을 덧붙여 1982년에 펴낸 것이 ‘칸트의 정치철학’이다.
아렌트가 처음부터 정치철학에 관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렌트의 관심 영역은 형이상학과 신학이었다. 정치는 아렌트의 외부에서 운명처럼 덮쳤다. 1933년 나치가 독일을 장악한 뒤 아렌트는 시오니즘 운동가들을 돕다가 붙잡혀 구류를 산 뒤 독일을 탈출해 파리로 망명했다. 1940년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수용소에 갇혔던 아렌트는 가까스로 탈출해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애초에 유대인 의식이 강하지 않았던 아렌트는 이 폭력적 사건들을 겪으며 유대인으로서 자의식을 확립했고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첫 번째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정치의 파괴가 전체주의를 낳았으며 전체주의는 정치를 다시 회복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았다.
아렌트에게 정치에 대한 사유를 더 깊게 할 계기를 준 것은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참관하고 쓴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는 미증유의 대학살을 집행한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보았고, 그 악의 바탕에서 ‘무사유’(thoughtlessness)를 발견했다. 사유하지 않음, 더 정확히 말하면 반성적으로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악을 산출한 정신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 사건을 계기로 하여 아렌트는 철학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를 종합하는 저작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결과가 ‘정신의 삶’이 될 터였다. 아렌트는 철학적 사유, 실천적 의지, 정치적 판단을 하나로 꿰려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했다.
‘칸트의 정치철학’에서 아렌트는 칸트의 제3비판서 ‘판단력 비판’을 정치적 판단에 대한 사유의 장으로 삼는다. 아렌트가 ‘강의’의 첫 시간에 이야기하는 대로 “칸트는 정치철학 책을 쓴 적이 없다.” ‘판단력 비판’은 미학에 관한 저작이다. 아렌트는 이 미학에 관한 저작이야말로 칸트 정치철학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미학이 정치학이 될 수 있는가? 핵심은 미학적 판단이 정치적 판단과 아주 유사하다는 데 있다. 칸트가 말하는 ‘취미 판단’이라는 것은 ‘이것은 아름답다, 혹은 아름답지 않다’ 같은 판단이나 ‘이것은 쾌감을 준다, 혹은 불쾌감을 준다’ 같은 판단을 가리킨다. 이런 미적인 판단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리 판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학적 판단은 ‘추함과 아름다움’, ‘쾌감과 불쾌감’을 가르는 판단이다. 그런 판단에는 ‘진리냐 아니냐’ 하는 물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런 미적 판단은 인간의 ‘복수성’을 전제로 한다.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가운데 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려고 제시하는 것이 미적 판단이다. 이때 미적 판단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 나오는 결론이 아니다. 다시 말해 수학처럼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미적 판단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호소하는 것 말고 다른 설득 수단이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으려면 무언가 공동의 지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칸트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이라고 불렀다. 이 공통감각은 공동체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각이기에 ‘공동체 감각’이라고도 한다. 이 공동의 감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미학적 문제를 놓고 소통할 수 있다. 이 공동의 감각에 호소하여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미적인 판단은 보편성을 얻는다. 바로 이런 미적 판단의 소통 방식이 정치 영역에서 의견들 곧 정치적 판단들의 유통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다.
그러나 다수의 동의가 곧바로 그 정치적 판단의 옳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판단의 옳음과 그름을 판별하는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강의에서 아렌트는 답을 명료히 밝히지 않는다. 대신에 ‘정신의 삶’ 제1부 ‘사유’에서 아렌트가 얘기하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대화’를 통해, 올바른 판단에 이르는 길을 찾아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홀로 있을 때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이 ‘자기와 자기의 대화’는 다른 말로 하면 반성적 대화다. 자신의 행위나 생각에 대해 또 다른 자기가 판단하고 비평하는 것인데, 이때 이 제2의 자기를 구성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끌어들여 제2의 자기를 확장하고 그 확장된 자기를 통해 제1의 자기와 대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성찰적 대화를 통해 보편적으로 통하는 옳은 생각이 형성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끔찍한 학살을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한 것은 ‘내적 대화를 통해 옳은 생각에 이르는 반성적 사유’를 차단하고 상부의 명령을 진리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무사유를 깨뜨리는 것은 반성적 사유이고, 반성적 사유는 공동체의 여러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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