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번역인생, 슬럼프는 한순간도 없었다” [책&생각]
젊은 시절 친구들은 그에게 종종 물었다. “번역해서 먹고살 수 있냐?” 그럴 때면 그는 “아주 잘 먹고 잘산다!”라고 답했다. 첫 번역서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지금까지 번역한 책의 권수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30년간 번역 외길을 걸어오며, 아직도 번역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강주헌(66) 번역가를 지난 4일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만났다.
1988년에 언어학 박사 학위를 따고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교수 임용은 요원해 보였단다. 그래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로 망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번역은 돈이 전혀 없어도 할 수 있는 ‘무자본 사업’이니까 시작했죠.”
그의 ‘창업’은 성공적이었다. ‘잘 읽히는 쉬운 번역’으로 이름을 날렸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 ‘지식인의 책무’ 등으로 촘스키를 국내에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문명의 붕괴’ ‘어제까지의 세계’ 등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데도 그의 지분이 크다. 묵직한 인문과학서 번역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톨스토이와 오스카 와일드 같은 고전에서부터 자기계발서와 종교서적까지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번역했다. ‘습관의 힘’이나 ‘12가지 인생의 법칙’과 같은 대형 베스트셀러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번역가로서 필요한 3가지 자질에 대해서 외국어 실력, 한국어 실력, 성실성을 꼽았다. 외국어 실력은 기본이다. 그는 “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선 학생들에게 신문을 읽으라고 늘 말한다”며 “내가 지금까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게 30년간 신문을 구독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쉽고 간결하게 쓰여진데다 정치·경제부터 사회·문화까지 모든 분야를 다룬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문장력과 다방면의 배경지식을 쌓는 데 신문만 한 교재가 없다는 것이다. 성실성은 단어 하나하나에 가장 적합한 우리말을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1년에 10여권 번역했으니까 30년간 300권 정도 번역했을 거 같다”는 그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슬럼프라곤 단 한순간도 없이 늘 즐겁게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새로운 분야를 번역하니까,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고, 그 지식을 얻는 즐거움이 아주 컸는데, 심지어 그걸 남들보다 먼저 알게 되니까 얼마나 재밌겠냐”며 웃었다. “프리랜서여서 비싼 성수기에 여행을 안 가도 되는 것도 번역가로 사는 기쁨”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02년부터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번역도 꾸준히 가르쳐왔다. 지금까지 21년간 약 100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수십명이 번역가로 데뷔했다. 매주 금요일 충주 자택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번역 일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매주 한번 대도심에 나와서 젊은이들을 만나는 게 바람도 쐬고 에너지도 얻는 루틴이다.
정상급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40∼50대에는 해외 저작권을 중계하는 에이전시도 설립해서 운영했고, 자신이 키워낸 제자들의 모임도 이끌었지만, 지금은 모든 걸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번역만 하고 있다. 60대에 들어서서는 번역량도 절반으로 줄이고, 생활 패턴도 확 바꿨다. 새벽 5시까지 밤새 번역하고, 주말도 없이 번역하고, 눈만 뜨면 침실에서 서재로 건너가 번역하던 삶에서 이제는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으로 바뀌었다. 평일 저녁에는 아내와 산책도 하고 파크 골프도 치고, 주말에는 교회도 다니고 가족여행도 다닌다.
지난 30년간 번역가에 대한 처우나 현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출판사들은 첫 번역서를 낸 아무리 초짜 번역가라고 해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대해줍니다. 또 한국에선 책 표지에 저자 이름과 역자 이름이 나란히 병기됩니다. 외국에선 그렇지 않아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의 영국 책 표지를 보세요. 소설가 한강 이름만 있지, 그 유명한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이름은 없어요. 이런 걸 고려하지 않은 채 번역가들이 홀대받는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배우고 공부한 것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온 그는 올초에 그 고민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원서, 읽(힌)다’(길벗이지톡)는 촘스키의 생성문법으로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을 썼던 그가 영어 원서를 잘 읽을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영문법을 아무리 배우고 공부해도 현실에서 만나는 영문장이 난감한 사람들을 위해, 문법 전문가가 300여권을 번역하며 쌓은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주고 있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총, 균, 쇠
세계적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인류 문명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은 대표작이자, 문명의 생성과 번영의 수수께끼를 밝힌 현대의 고전이다. 강 번역가는 “이 책의 핵심개념은 근접 원인과 궁극 원인”이라며 “문명의 차이가 인간의 차이가 아니라 근접 원인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김영사(2023)
문명의 붕괴
이스터 섬의 폴리네시아 문화, 아나사지와 마야에서 꽃피웠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개척한 바이킹들의 불행…. 과거 위대한 문명들의 붕괴 패턴을 찾아낸다. 강 번역가는 “어떤 사회가 발달하고 어떤 사회가 붕괴하는지를, 환경이라는 과학적 입장에서 추적한 가장 최초의 책”이라고 추천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김영사(2005)
어제까지의 세계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대연구 3부작 완결편으로, 바로 어제까지 존재했던 전통사회에서 배워야 할 교훈들을 들려준다. 강 번역가는 “특히 전통사회의 ‘건설적 편집증’이란 개념이 재미있고 눈여겨볼 만하다”고 소개했다. 건설적 편집증이란, 아주 작게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대해 편집증에 가깝게 조심하는 태도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김영사(2013)
지중해의 기억
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리며 현대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 브로델의 유고작이다. 지중해의 역사를 ‘파노라마’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에 대해 강 번역가는 “브로델이 죽은 뒤 다른 사람이 정리해서 쓴 책이다 보니 번역할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책”이라고 말했다.
페르낭 브로델 지음, 한길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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