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여름엔 부채, 겨울엔 난로

관리자 2023. 8. 1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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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줄지어서 들려오는 나쁜 소식이 마음을 퍼렇게 멍들게 하는 한여름이다.

이렇듯 상황과 필요에 부합하지 않고 엇박자를 내는 사람의 능력과 조언을 여름(夏) 난로(爐), 겨울(冬) 부채(扇), 즉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고 한다.

무더운 여름에 난로를 주며 도와주었다고 하고, 한겨울에 부채를 선물하며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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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 난동·교권 침해·부실 공사
폭염 속 흉문들에 멍드는 마음
지금 필요한 것은 실질적 대책
네탓공방·책임전가 도움 안돼
벌어지는 일 있는 그대로 보고
해결방안 조언할 탁견 아쉬워

폭염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줄지어서 들려오는 나쁜 소식이 마음을 퍼렇게 멍들게 하는 한여름이다. 대낮에 흉기를 소지한 사람이 일면식 없는 시민에게 무차별 상해를 가하고, 철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조롱하며 부르는 순살 아파트는 기대에 부푼 입주민의 마음을 가시로 찌른다.

지각없는 학부모의 지나친 학교 개입에 가슴이 멍든 선생님들, 땡볕 벌판에서 지쳐 누워 있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청소년들, 무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소식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무더위야 하늘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인간의 일이야 얼마든지 대책이 있을 터인데,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들과 조언해줄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세상에 어찌 인재가 없을 것인가? 그 능력과 탁견이 꼭 필요한 때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도 쓸모없는 능력이 있고 아무리 좋은 조언도 도움이 안되는 조언이 있다. 폭염에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살려야 하는데 컴퓨터 전문가라고 자신의 능력을 내 앞에서 자랑하거나 어떻게 하면 옥수수를 잘 키울까를 걱정하고 있는 농부에게 돈을 불리기 위한 금융 조언을 한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사람의 능력이며 조언이다.

이렇듯 상황과 필요에 부합하지 않고 엇박자를 내는 사람의 능력과 조언을 여름(夏) 난로(爐), 겨울(冬) 부채(扇), 즉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고 한다. 무더운 여름에 난로를 주며 도와주었다고 하고, 한겨울에 부채를 선물하며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다.

하로동선은 한나라 시기 신비주의 철학을 비판했던 철학자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나오는 말이다. 왕충은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결합한 신비적 참위(讖緯) 사상을 부정하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근거를 중요하게 생각한 합리주의 철학자였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은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선과 악의 결과로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늘의 노여움과 축복으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폭염은 기상 변화에 따른 결과지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비가 안 온다고 굿을 하고 더위가 계속된다고 하늘을 탓하는 것은, 여름에 난로를 찾고 겨울에 부채를 찾는 것과 같다. 폭염에는 시원한 그늘과 영양가 있는 음식, 냉방이 잘되는 안락한 잠자리가 필요하다.

여름에는 부채가 필요하고 겨울에는 화로가 필요하다. 그런데 세상은 정상과 상식이 밀려나고 신비와 억지가 판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 가고, 지엽적이고 도움이 안되는 논의로 세상은 시끄럽다. 대낮 흉기 난동 사건에 필요한 것은 시민의 안전을 위한 근본적인 방안이지 인간 심리 분석이 아니다. 철근 없는 순살 아파트에 당장 시급한 것은 안전 대책과 실행이지 구호만 난무하는 비난이 아니다. 일부 학부모의 비정상적인 교권 침해에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교권 확립을 위한 제도 개혁이지 학부모와 선생님에 대한 책임 공방이 아니다. 땡볕 더위에 고통받는 청소년에게는 더위를 식혀줄 빠른 보완책이 급선무지 당리당략에 따른 책임 전가가 아니다. 여름에 부채가 필요하지 난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관념과 구호, 이상과 명분보다 중요한 것이 현실과 실제다. 이념의 그물에 걸리면 현실은 붕괴하고 실재는 사라진다. 명분의 구호가 둘러쳐진 곳에는 안전과 생존이 위협받는다. 여름에 부채를 내놓아라! 겨울에는 화로가 필요하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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