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1945년 8·15< 1948년 8·15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3. 8. 1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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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15의 정부수립 좌파는 親美·單政이라며 ‘태어나선 안 될 나라’ 비판
이는 목적론적 역사서술일 뿐 실증과 체험은 반대로 증언
그 뒤 대한민국 성취를 보라… 도둑같이 온 45년 해방보다 48년의 건국이 훨씬 값지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오세창의 사회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 기념식. 이 자리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가 넘치는 새나라 건설을 다짐했다./국가기록원 제공

며칠 뒤면 다시 ‘8·15′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을 기리는 국경일인지 늘 애매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뜻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출범을 경축하는 의미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나쁠 건 없다. 오히려 ‘기쁨 두 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개의 8·15 가운데 막상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무릇 국경일이란 국민 통합을 위한 것일진대, 광복절은 그 반대일 때가 많다.

해마다 8·15만 되면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는지를 놓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한데 이번에는 다소 의외의 곳에서 불이 댕겨졌다. 광복회장이 상해임시정부에 의한 1919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제기하면서 1948년 건국론을 매국(賣國)으로까지 규정한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보수·우파 진영 내부에서 비판과 반격이 오가는 가운데 해묵은 건국절 제정 논쟁까지 소환되는 분위기다.

1945년 8·15와 1948년 8·15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이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맞서 있다. 우선 진보 진영에서는 1945년 8·15를 단연코 더 높이 챙긴다. 식민지 시대에 누적된 계급모순이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으로 분출한 날이라는 이유에서다. 수정주의 역사가(歷史家) 커밍스의 말마따나 압력밥솥 뚜껑이 열린 날이다. 그런 만큼 반공·친미·단독 정부가 출범한 1948년 8월 15일은 민족사의 예정된 진로가 좌절된 날이다. 이로써 두 8·15는 서로 ‘역접(逆接)’ 관계를 이룬다. 좌파 사관은 단정(單政) 수립에 대한 거부감으로 통일·민족주의 사관에 어필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서술은 그러나 당대인들의 체험과 기억 및 실증사학의 벽을 넘기 어렵다.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은 1945년 8·15와 1948년 8·15를 ‘순접(順接)’ 관계로 보는 것이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준비하지 못했다. 당시 대다수 조선인에게는 해방의 감격보다 (대동아)전쟁의 질곡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당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잡음이 심했던 데다가 난해한 ‘황실 언어’였기 때문이다. 해방의 주역인 연합국들 또한 한반도 전후 처리를 놓고 동상이몽이었다. 결국 해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독립을 외치는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해방공간 3년은 평탄대로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의 남북한 분할점령이 있었고, 신탁통치 프레임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의 오랜 공전(空轉)이 있었다. 이남에서는 좌우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던 반면 이북에서는 공산정권이 속전속결로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내치(內治)에도 미숙했다. 이런저런 애로와 난관을 감안하자면 대한민국 탄생은 초기 국가건설자들의 현명한 선택과 불굴의 집념이 만들어낸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취가 증명하는 바이다. 졸지에 맞이한 8·15 해방보다 우리 손때가 묻은 8·15 건국이 훨씬 값지다. 건국은 해방을 독립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3년 터울의 8·15 형제도 그래서 생겼다.

‘건국’이라는 용어가 불편할지 모른다. 역대 왕조는 뭐고 임시정부는 또한 뭐냐는 반문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1948년에 선포된 대한민국은 ‘근대국가(modern state)’였다. 권력, 지배, 통치 등을 포괄하는 광의의 국가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과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근대국가는 유럽 근대사의 독특한 산물이다. 근대 사회과학의 태두 막스 베버가 ‘영토의 획정,’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 ‘국정의 공공성과 합리성,’ ‘전 국민 정치공동체’라는 특성에 주목하여 근대국가를 따로 정의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서구에서 발원한 근대국가 모델은 싫든 좋든 글로벌 스탠더드로 진화했고, 해방정국에서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든 근대국가는 정통성이라는 이름의 족보(族譜) 보강을 위해 역사와 민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5세기의 프랑크 왕국을 언급하고,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11세기 ‘카노사의 굴욕’을 환기할 정도다. 그렇다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전사(前史)’에 대해서도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가 특히 그렇다. 다만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화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학문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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