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대통령제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전성철 IGS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2023. 8.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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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각기 꽤 오래 살면서 두 나라 정치를 다 구경해 본 사람이다. 그 소감은 이렇다. 미국 정치가 ‘농구 시합’ 보는 것 같다면 한국 정치는 ‘권투 시합’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가 ‘팀플레이’를 기본으로 하는 ‘경쟁 게임’이라면, 한국 정치는 서로 때려눕히는 ‘격투 게임’인 것이다. 그 ‘격투 경기’만 1년 내내 보며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한마디로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 38국가 중, 우리같이 국민이 맨날 살벌한 ‘권투 시합’만 보며 살아야 하는 나라는 우리 말고도 4곳이 더 있다. 칠레, 멕시코, 튀르키예(터키), 콜롬비아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17년간 시민을 무려 10만여 명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멕시코는 무려 77년 동안 한 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참 고통스럽고 긴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내각제로 순조롭게 발전해 가던 튀르키예는 2014년 대통령제로 바꾼 지 2년 만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후에도 정쟁의 회오리가 계속되고 있다. 콜롬비아도 비슷한 유의 온갖 시련을 겪어 왔다. 신기하게도 한국을 포함한 이 다섯 나라에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대통령제 국가’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제 국가 5곳이 다른 나라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바로 대통령에게 소위 ‘대권’이라는 것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대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군 통수권, 검찰권, 경찰권, 감사권, 인사권, 조세권 등 수십 가지 각종 권력·권한이 궁극적으로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을 말한다. 거기에 ‘4~5년 임기’까지 보장됐다. 그 총합적 힘의 위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이 발현하는 거대한 영향력과 ‘떡고물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싸움판’을 유발한다. 그래서 이 나라들 정치는 모두 예외 없이 온통 ‘싸움판’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대통령제인데 유독 미국 정치에는 ‘싸움판’이 없다. 왜 그럴까? 그 나라 대통령제가 우리와 다른 ‘종’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이다. 수십 주가 일종의 ‘계약’을 통해 세운 나라이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한 나라이지만, 대내적으로는 사실상 수십 나라가 협동으로 작동되는 그런 구조인 것이다. 그런 나라는 ‘대권’이 주어질 수가 없다. 사실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외교, 국방, 거시 경제, 각 주의 이해관계 조정 등 몇몇 분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대권’이 없으니 ‘싸움판’이 벌어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미국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OECD의 나머지 나라 약 30곳 정치에는 왜 ‘싸움판’이 없는가? 답은 같다. 그 나라들에는 ‘대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 모델인 내각제를 보자. 그곳 최고 권력자인 총리에게 ‘대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보장된 ‘임기’도 없다. 여차하면 국회 불신임 결의로 쫓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총리에게는 아무 ‘칼’도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국회 해산’이란 ‘칼’을 빼 들 수 있다. 그러면 총선을 통해 ‘판’을 새로 짠다. 이런 위험이 있으니 국회도 매우 조심한다. 총리도 국회도, 항상 국민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처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향한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판 같은 ‘싸움판’이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심판권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 대접’을 정말 제대로 받는 것이다.

이 내각제의 대단한 위력은 그동안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OECD 국가의 3분의 2가 내각제를 택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 두 가지 예만 들자. 인구 천 만도 안 되는 나라 이스라엘은 지난 몇 십 년간 수억 인구를 가진 주변 아랍 국가들에 무려 네 차례나 거대한 무력 침공을 당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다 깨끗이 격퇴했다. 그러면서도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의 1.5배가 넘는 나라, 그것이 바로 ‘내각제 국가’ 이스라엘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나오는 “북한의 침공 위협 등 때문에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무식의 소치’인지는 자명하다. 약 200년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던 대영제국, 한때 전 세계 면적의 4분의 1, 인구의 6분의 1까지 지배했던 그 나라는 내내 내각제 국가였다.

왜 내각제가 이런 신통력을 발휘할까? 그 원리는 간단하다. ‘싸움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생산적 에너지’로 변환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라가 편안하고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이 1960년대 4·19 직후 시도했던 내각제 실험, 그것이 불과 1년 만에 쿠데타로 좌절되어 버렸다는 점은 사실 참 아쉬운 면이 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5·16으로 시작된 군사정권, 그리고 이후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이 그동안 치러야 했던 그 엄청난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군부 독재, 3선 개헌, 유신 독재, 5·18 민주화 운동, 전두환 독재 등 근 50년 동안 우리 국민이 겪어야 했던 그 참담한 고통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선진화’를 위해 국민이 우리같이 이토록 처절한 대가를 치른 나라는 없었음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동안 이 지구촌이 우리에게 보여준 현실은 명확하다. 대통령제란 대한민국 같은 선진국에는 단연코 적합하지 않은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맹률이 절반 이상 되는 그런 나라, 국민이 워낙 미개해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한 ‘현자’ 통치자가 한 명 꼭 필요할 때 할 수 없이 채택하는 것이 ‘대통령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촌스럽기 짝이 없는 모델이다.

생각해 보라! 도대체 우리 같이 최상급 문명국, 그 우수한 국민들로 구성된 나라가 아직도 단 한 명의 판단에 모든 것을 위탁하면서 살아야 하겠는가? 그 필연적 결과인 이 진절머리 나는 싸움판을 앞으로도 계속 참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이 지저분한 괴물을 정말 우리 후손에게 그대로 물려주고들 싶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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