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묻지마 범죄’와 살인예고를 바라보는 시선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2023. 8.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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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 고립된 이들 화풀이, 정신질환 취급땐 해결 안돼
모방범죄 실제로 안 생기게 SNS 굴레 밖 현실소통 필요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서울 신림동에 이어 분당 서현역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다들 세상이 미쳤다고 한다. 일상생활 공간에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죄. 전국에서 이를 모방한 살인 예고가 속출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묻지마’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미치광이, 은둔형 외톨이, 사회 부적응자, 사이코패스, 막장인생의 흉악범. 한 마디로 괴물이다. 나와 다른 괴물. 우리는 종종 언어라는 틀에 갇혀 그 안 다양함을 보지 못한다. ‘묻지마’가 그런 게 아닐까. 이질적인 괴물로 취급하면 마음은 편하다. 극소수의 그들만 통제하면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는 환상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동네 이웃이 그를 소개한다면 어떨까.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웃일 것이다. 결국 일상의 공간은 언제든 테러 현장으로 돌변할 수 있다.

20세기가 ‘고독한 군중’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함께 외로운’ 시대이다. 한국에서는 ‘정(情)’이라는 테두리에 타인을 이웃으로 묶지만, 오래전에 프로이트가 언급했듯 이웃이란 불편한 침입자에 가깝다. 우리를 불안케 하고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타인이다. 가장 끔찍한 타인은 원수의 집안에 있지 않고 층간 소음으로 괴롭히는 윗집에 산다. 오늘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한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어슬렁거리는 청년을 떠올려 보라. 다들 무신경하게 지나치지만 이어폰을 빼고 큰 소음을 낸다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골목길에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을 마주치면 어떤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질 것이다. 공포는 사회적 관습의 위반에 있지 않다. 오히려 기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엄습한다. 언제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 우리는 호신용품 품절 사태가 빚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묻지마 범죄’를 매끈하게 분석하고 정리하려는 시도보다 오히려 ‘일련의 사건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모든 진실은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다. ‘묻지마’에 물어야 할 질문이 여전히 많고 물어야만 한다. 개인의 일탈과 병리적인 현상에 초점이 맞춰지면 ‘묻지마’의 폭력이 발생한 사회 구조적인 원인은 묻히게 된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 인구보다 현저하게 낮다. 강력 범죄와 비교하더라도 일반 국민이 저지르는 강력 범죄의 건수보다 낮은 수치를 보인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전 지구적인 문제이다.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도리마(通り魔)’, 길거리 악마라 칭하는 ‘묻지마 범죄’가 심각하다. 무한 경쟁의 플랫폼에서 도태되는 개인이 속출하고 날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된다. 현재까지 은폐된 불평등과 혐오, 착취와 같은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기괴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듯하다.

‘묻지마 범죄’ 5건 중 2건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자의 화풀이 범죄라고 한다. 신림동 사건 피의자의 말이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폭력은 상대에 대한 열등감과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증오하고 왜 그토록 화가 난 걸까. 사회에 적개심을 가진 계급이 잔혹한 방식으로 반격하는 듯하다. 새로운 계급투쟁 말이다. 일종의 ‘히키코모리’나 경제적 난민 또한 세계화된 지구촌에서 주목해야 할 새로운 계급이 아닐까. 결국 세계적인 연대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까지 전국의 살인예고 게시글이 194건에 달한다. 심지어 ‘칼부림 예고’ 알림 사이트까지 생겼다. 성인이 술에 취해 적거나 게시자의 절반이 넘는 10대가 관심을 끌려고 올린다. 철없는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불편하고 서늘하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게임 캐릭터처럼 재미로 죽이겠다는 발상, 스스럼없이 장난 삼아 살인예고를 하는 유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허위의 글이라도 잠재적 분노가 ‘묻지마 범죄’와 교집합을 형성하진 않을까. 실제 범죄로 이어지지 않은 잠재적 분노는 허위가 맞는 걸까. 성남의 흉기 난동 피의자는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을 검색한 적이 있다.


살인예고가 가볍게 모방되는 상황은 온라인이 기호의 세계라는 것과 연관 있는 듯하다. 검색은 사용자의 연상에 따라 수행된다. 화가 난 상태라면 소셜미디어는 알고리즘을 통해 더 폭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한다. 사용자는 다른 검색어로 알고리즘에 저항하지 않는 한 폭력의 소속으로 고정된다. 우리는 대화 부재의 시대에 살면서 역설적으로 대화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의사소통은 어쩌면 성공적인 오해이다. 온라인에 넘치는 온갖 종류의 대화에도 사람들은 불안하고 외롭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깊은 관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점점 더 비인격화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얼까. 모든 존재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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