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가을을 기다리며

김희선 소설가·약사 2023. 8.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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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고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타자에 대해 이것저것 상상한다면, 그 상상은 거의 항상 같은 지점으로 수렴되어 간다. 그 지점은, 자신을 기다리는 타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결론이다.”

일본 철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기다리는 것과 기다려지는 것’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틀어 읽으며, 기다려지는 고도의 입장을 되돌아본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극 중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고도야말로 오히려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만약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인간은 누구나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또는 뭔가에게 기다려진다. 그럼에도 내겐,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의 초조와 허무보다 그들에게 기다려지는 고도의 불안이 더 크게 와닿는다. 고도는 어딘가에서 오고 있겠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앞에 도달하기 전까진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기다려지는 고도의 존재는 온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 의해 규정된다. 오사와 마사치를 다시 인용하자면, 결국 “기다리는 자들이 종속되어 있는 기다려지는 자야말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오사와 마사치의 책을 꺼내 읽은 것은, 가을 때문이었다. 오후 들어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더니 파랗게 씻긴 하늘 너머로 치악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문득 달력을 열어보니 내일이 입추(立秋)였다. 여전히 무덥지만, 높이 솟으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적란운 뒤로 ‘기다려지는 가을’의 불안과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우리가 가을을 기다리기에, 그 계절은 그렇게도 좋은 것 아닐까.

“내가 오고 있어”라고 귀띔하듯 입추 저녁부턴 바람도 선선해진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부턴 그저 시간이 흐르는 걸 보고만 있으면 될 일이다. ‘가을은 기다려지며’ 어디선가 오고 있고, 눈치채지도 못하는 새에 밤공기는 서늘해질 테니까.

김희선 소설가·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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