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4. 김차섭·김명희의 노마드 사랑

최돈선 2023. 8. 11. 0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달리할 뿐 우리의 유랑은 계속된다
유관순 기념관 벽화작업 첫 만남
미국 대학원 유학길 그리고 결혼
세계 각지 여행하며 시야 확대
김차섭 작가 에칭판화 뉴욕 주목
‘칠판 캔버스’김명희 작가의 발견
1990년 건강 회복 차 춘천 이주
33년간 미국-한국 오가며 작품생활
지난해 영면 든 김차섭 작가
내평리 작업실 미술관 조성 계획

■ 우주의 노마드

김차섭과 김명희 작가는 자신들을 노마드라 이름했다. 풀이하면 유랑인, 유목민, 자유로운 영혼이란 뜻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의 목자라 했다. 유목민을 통해 종교가 이루어졌듯이 목자는 순례자의 길을 상징한다. 그런 부부가 내평리에 있다고 어느 날 나는 들었다. 그들은 부부임에도 서로 다른 개체이며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2022년 여름, 남편은 새로운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하여 지구를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이다. 이제 남편은 진정한 우주의 노마드가 되었다.

아내만 홀로 남았다. 숲에 둘러싸인 작업실에서 김명희는 외롭게 그림을 그린다. 남편은 그 옛날 삼각형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몇 년을 고심하고 또 고심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잔디밭에서 그 나무 삼각형 밑변 한 귀퉁이를 불살랐다. 불에 탄 한 귀퉁이를 통해 삼각형은 비로소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내뿜었다. 들숨 날숨의 허파가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로부터 남편 김차섭은 혼돈과 질서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의 예술작업은 극미의 미니멀리즘에서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떠났다.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작가 김명희는 생각한다. 떠남은 없다고. 당신의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고. 이제 당신은, 남편이 아닌 한 예술가의 동지로서 여기에 남아 있다고.

■ 만남과 이별, 그리고

김차섭과 김명희의 만남은 유관순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1973년 이화여고 내에다 유관순 기념관을 건립할 때 기념관 벽화를 이화여고 교사였던 김차섭과 김명희 선생이 맡았다. 무보수였다. 한겨울을 꼬박 작업했다. 작업공간인 시청각교실은 너무 추웠다.

1974년 봄, 벽화가 완성되었다. 벽화의 구성원 모두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 유관순 기념관 2층 벽에 ‘더 모멘트 오브 액션(The Moment of Action)’이란 벽화가 걸렸을 때 두 사람의 감회는 남달랐다. 김차섭은 그해 미국으로 갔다. 록펠러 펠로십 지원을 받아 뉴욕 프렛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듬해 시월 김명희도 건너와 프렛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76년 둘은 뉴욕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몇몇 지인들만 참석한 결혼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김차섭은 당시 강가의 돌멩이를 극사실로 그려내는 에칭 판화작업에 몰두하던 때였다. 그때 김차섭의 에칭 판화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과 브루클린 미술관에 연이어 소장되었다. 뉴욕화단은 김차섭을 주목했다. 실력 있는 젊은 판화작가를 화상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전속계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김차섭 작가는 거부했다.

화상과의 계약은 생활의 안정을 가져올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화상들의 입맛에 따라 작가는 당연히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노예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김명희는 그런 남편의 생각을 이해했다. 하지만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김명희는 대학원을 졸업한 뒤 메디슨 에비뉴 77번가에 의류가게 ‘피놀라’를 차렸다. 첫해, 가게 차리느라 빌린 돈 3만불을 다 갚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후, 피놀라는 유명 패션가게로 소문이 났다. 1982년엔 소호의 로프트를 사서 이사했다. 살림과 더불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공교롭게도 백남준의 작업실이 바로 옆이었다. 미니멀리즘의 주창자 도널드 저드의 집도 한동네였다. 이들과 김차섭 김명희 부부는 따뜻한 교분을 맺기도 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김차섭 김명희 부부는 세계 각지를 순례하면서 시야를 넓혀나갔다. 그중에도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명을 접했을 때, 두 작가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이 김차섭의 커피컵 시리즈로 형상화되었고, 김명희의 정밀한 그림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인과 닮은 이 동질의 초상은 먼 시원을 더듬어가는 DNA의 작업이었다. 1987년 7월과 9월, 서울에서 김명희의 드로잉전과 김차섭의 작품전이 열렸다. 한국은 이들의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 그들이 깊은 숲으로 들어온 까닭은

김차섭이 에칭 작업으로 하여 눈에 이상이 생겼다. 에칭 작업 때 독한 화공약품을 사용한 탓인 듯싶었다. 신선한 공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김차섭의 귀국 제안에 아내 김명희는 흔쾌히 동조했다. 이들이 택한 곳은 내평리 산골 폐교였다. 소양댐으로 수몰된 마을 내평리는 호수를 낀 오지였다. 1990년 김차섭과 김명희 부부는 이주를 마쳤다. 그리고 봄에 내평리로 날아왔다가 겨울이 오면 뉴욕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유랑하는 철새라 불렀다. 김차섭의 흐린 눈은 언제인가 싶게 말끔해졌다. 저마다 교실 하나씩 차지하고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을 그들은 얼마나 바라 왔던가.

이들 부부에겐 내평리가 세계의 중심이었고, 새로운 시발점이었다. 내평리와 소호, 소호와 내평리의 오고 감은 33년간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

어느 날 김명희의 모친이 이렇게 물었다. “너희 집은 어디니?”

■ 칠판 그림의 발견

어느 날 김명희는 교실에 걸린 칠판을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다. 거기에다 백묵으로 한 소년을 그렸다. 여행을 다닐 때 고성 바닷가 뱃전에 앉아있던 소년이었다. 문득 김명희는 마음속으로 나직이 외쳤다. “바로 이거야!”

칠판엔 특수한 물감이 필요했다. 점성이 좋은 오일 파스텔을 사용했다. 칠판이란 캔버스는 아주 독특한 소재였다. 게다가 칠판엔 지난날의 티 없는 소년 소녀들이 아름다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것이 확장을 거듭하여 극사실의 ‘비밀정원’이 되고, ‘사마르칸트의 황금 복숭아’가 되고,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아시아로 ‘추방’되는 고난의 길이 되기도 했다.

■ 거꾸로 본다는 일은 바로 본다는 일

김차섭 또한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는 세계 저 너머를 응시했다. 김차섭은 천문과 수학에 심취했다. 화가가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마치 천상의 신처럼 지구를 내려다보는 김차섭은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김차섭은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지도는 거꾸로 되어 있었다. 한국이 물구나무를 선 것이다.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무한대의 팔자곡선을 그리는 태양의 궤적, 그리고 백마와 접촉하려는 한 남자(김차섭)의 손 그림, 이것을 김차섭은 아날레마라 이름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다름없는 이 그림은 대체 어떤 우주의 현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우린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남에서 북을 바라보는 서양식 관점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응시는 동양을 정복하기 위한 항해의 지표이지만, 이것을 동양인의 관점에서 뒤집어 본다면 자연의 섭리인 생명의 눈과 일맥상통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구본은 거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김차섭의 생각인데, 그 세계는 과연 또 어떠한 질량과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그런 세계를 찾아 김차섭 작가는 미지의 탐험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8월 19일은 그가 떠난 지 일 주년이 되는 날이다. 각 처에서 예술가와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춘천으로 온다고 한다. 이분들의 모임 자리에서 내평리 작업실을 김차섭 미술관으로 조성하기 위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다. 이 국제적 예술가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춘천인 모두 세심한 협조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