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상기후 시대의 불시화(不時花)
어느 때부턴가 산에서 뜻밖의 꽃들과 자주 만난다. 초가을에 벚꽃, 늦겨울에 진달래. 육상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계주하듯, 꽃들도 자연의 운동장에서 차례를 지키며 개화하는데 이를 이탈한 것이다. 무리에서 낙오한 오리처럼 어리둥절 피어 있는 꽃을 두고 때를 맞추지 못했다는 뜻으로 불시화(不時花)라고 명명한다. 꽃들의 이어달리기에서 순서가 점점 헝클어지고, 자연의 계단이 붕괴되었다는 한 전조일까.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광야’, 이육사)”처럼 한반도는 북방에서 남으로 내리닫다가 “금수로 구비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울릉도’, 유치환)”로 울릉도를 점찍은 뒤 남해의 땅끝에서 멈추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위도가 높은 곳의 산일수록 높다고 여긴다. 하지만 해발을 꼽아보면 바다 건너 한라가 첫째이고 지리와 설악의 순이다. 생명은 바다에서 오고, 산은 바다에서 융기했다. 해발이란 말, 산꼭대기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사실의 영토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간다.
인간의 횡포에 맞선 자연의 경고는 자주 있었다. 그 후과로 올해 맞닥뜨린 미증유의 극한호우/극한폭염은 가히 우려스럽다. 그동안 지구는 여러 차례 빙하기가 있었고, 가장 최근 끝난 것은 1만년 전이라고 한다. 그때 북방계의 식물들이 따뜻한 남으로 피난했다. 그러다 온난화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찬 기운 감도는 정상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더러 있었다. 오늘날 한라산 꼭대기에서 겨우 살아가는 암매(巖梅)의 처지는 이 끓는 온도에서 이제 어떻게 될까.
불시화는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등재된다면 불각시에 지상에 도착했다는 뜻이기도 한 불시착의 이웃에 자리잡겠지. 지구가 온난화를 거쳐 열대화의 입구로 들어섰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요란하다. 이는 막연한 예감이 아닌 피부로 전달되는 따가운 통증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절정’)”고 육사는 ‘광야’와 사뭇 다른 방향의 시를 썼다. 가히 불과 물의 싸움에 끼인 불시화의 운명처럼 이제 우리의 거처도 바로 그에서 한 발 곁일 것인가.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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