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아침밥 먹었습니까?”
“먹지 않았습니다(빵은 먹었지만).”
몇년 전 일본에서 유행했던 ‘밥 논법’이다. ‘밥 먹었냐’는 질문이 ‘식사했냐’는 의미인 줄 뻔히 알면서 ‘(빵을 먹었으니 밥은) 먹지 않았다’라고 논점을 흐리는 수법이다.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친구가 이사장인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커졌을 때 화제가 됐다. 아베 총리와 그 측근들이 책임 추궁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태도를 비꼰 것이다.
예컨대 아베 총리의 전 비서관은 국회에서 “(가케학원 문제로) 이마바리시 직원과 만났냐”는 질문에 “직원과 만난 기억은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가케학원 관계자와 에히메현·이마바리시 직원과 면담한 문서가 나오자 그제서야 가케학원 관계자와 접촉했다고 인정했다. 앞선 국회 답변 때는 가케학원 관계자와 만난 사실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아베 총리도 에히메현 문서에 자신이 가케학원 이사장과 면담했다고 기록돼 있자 “관저 출입 기록을 조사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라며 면담 사실을 부인했다. 관저 출입 기록은 이미 폐기 처리돼 있었다. 출입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데도 기록을 확인해보니 면담 사실이 없었다는 듯이 답한 것이다. 도쿄 특파원 시절 기사를 다시 찾아본 건 요즘 대통령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술인 천공의 대통령 관저 이전 개입 의혹을 둘러싼 대응이 그렇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관저 후보지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둘러본 사람이 풍수학자 백재권씨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경찰이 지난 4월 공관 CCTV를 분석한 뒤 “영상에 천공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발표했을 때나 그 이후 언급되지 않았던 사실이다. 대통령실은 천공의 관저 방문이 쟁점이기 때문에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입장인데, 또 다른 논란을 우려해 함구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하다.
김건희 여사의 리투아니아 ‘명품 쇼핑’ 논란 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호객 행위”에 따라 방문한 것이라 했고, 여당은 “문화 탐방” “외교 행위”라고 두둔했다. 궤변에 헛웃음이 나온다. 심지어 대통령실에선 “정쟁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국내에 폭우 피해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평화를 논하는 나토 정상회의가 열리는 곳에서, 오해 살 행동을 왜 했냐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는 눈 씻고 봐도 없다.
또 있다. 김 여사 일가의 특혜 의혹이 나온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논란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사업 백지화를 선언했다. 용산어린이정원에서 윤 대통령 부부를 주제로 한 색칠놀이 도안을 제공해 논란이 일자 대통령실은 “현장에 빈 도화지도 있다”라고 했다. 상식적인 의문을 틀어막거나 논점을 흐리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베 정권 때 유행어가 하나 더 있다. ‘손타쿠’다. ‘미루어 헤아린다’는 촌탁(忖度)의 일본식 발음으로,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행동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를 개선한다더니 ‘손타쿠’도 바다를 건너온 모양이다. 앞선 사례들에서 보이듯 집권 2년차 들어 불리하거나 문제 될 만한 것은 알아서 숨기거나 얼버무려 넘기려는 행태가 두드러진다.
아베 정권 당시의 ‘손타쿠’는 아베 1강 체제의 장기화가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윤석열 정권과 상황이 다르다. 비슷한 것도 있다. 대안이 못 되는 야당의 존재다. 권력을 견제해야 할 야당이 헛발질만 해대니 거칠 게 없다. 여차하면 ‘괴담’으로 몰고, ‘이권 카르텔’로 찍는다. 뭐든 전 정권 탓으로 돌리면 된다. 새만금 잼버리 파행에 대한 여권의 반응도 “전 정부에서 5년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불완전한 대의민주주의는 자칫 권력의 독주를 낳을 수 있다. 선거가 끝나면 권력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주변은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거나 과잉 충성하며 자기보신에 몰두한다.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가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리 만무하다. 이미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굳어졌다. 반면 발뺌하고 남 탓하고 아부할 자유는 여기저기 넘쳐난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하게 고백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당선 일성은 의미를 잃었다. 이러다 ‘쌍팔년 개그’에나 나오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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