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힙지로의 두 얼굴
가수 이용은 그의 히트곡 ‘서울’(1982년 작)에서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라고 노래했다. 그 을지로가 요즘엔 ‘힙지로’로 통한다. ‘힙’한 을지로라는 말이다. 그 힙의 정체는 레트로와 뉴트로이다.
힙지로의 핵심은 을지로 3가 일대. 이곳은 서울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의 을지로3가역을 중심으로 4개의 블록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가장 힙한 곳은 서남쪽 블록.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중구 인현동으로, 예전엔 흔히 충무로 인쇄골목이라 불렀다. 1910년대 을지로 인근 영화관들의 광고 전단을 찍기 시작하면서 인쇄골목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엔 충무로로 확장되었고 1980년대엔 장교동의 인쇄업체들이 대거 옮겨오면서 성황을 이뤘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단순 인쇄뿐만 아니라 디자인 편집 코팅 금박 스티커 제본 등 인쇄에 관한 모든 것을 진행할 수 있는 독보적인 인쇄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골뱅이 골목, 노가리 골목도 인쇄업의 번창과 함께 생겼다.
2000년대 들어 산업구조가 개편되면서 인쇄업은 하향세로 들어섰다. 이곳을 떠나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지금 인쇄골목 여기저기엔 빈 곳이 눈에 띈다. 건물들은 노후했고 환경도 열악하다. 이곳 분위기는 여전히 1970~1980년대다.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인쇄골목은 인쇄골목이다. 지금도 낮에는 인쇄기계가 열심히 돌아간다. 인쇄물을 실은 오토바이, 지게차, 삼발이가 골목을 누빈다.
저녁이 되면 완전히 딴 세상으로 바뀐다. ‘핫플’ 맛집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힙지로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난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인쇄골목이 이렇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4~5년 전부터. 인쇄업소가 빠져나간 자리에 ‘핫’한 식당, 카페, 술집들이 속속 들어섰다. 주고객은 젊은층이다.
그 풍경이 흥미롭다. 어느 건물 유리창에는 ‘CTP출력 최신형5색·고급인쇄·제작대행 전문’이라고 쓰여 있다. 영락없는 인쇄업체인데 가까이 다가가니 꼬치구이집이다. 어느 건물 정면의 커다란 간판에 ‘종합인쇄 디지털마스타 신성미디어’라고 쓰여 있다. 잘나가는 인쇄업체 같은데 내부는 고깃집이다. 어느 건물 입구의 왼쪽 기둥엔 ‘주식회사 미진칼라인쇄사’라는 간판, 오른쪽 기둥엔 ‘을지맥옥’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유리창엔 ‘UV 특수인쇄’라 쓰인 코팅지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한 수제 맥줏집(맥옥)이다. 바로 앞 비좁고 어수선한 골목엔 고은손기획인쇄, 대원디앤피, 진로이즈백과 같은 간판과 광고물들이 뒤섞여 있다. 낮에 지게차와 삼발이가 오갔던 골목인데, 그 변신이 놀랍기만 하다.
‘도무송 반칼 오시 미싱 재단 타공 접지’와 같은 인쇄 관련 전문용어 간판도 보인다. 저 용어를 모두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그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잘 모르고 낯설기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인쇄골목에서 1970~1980년대를 열심히 즐기고 소비한다. 이것이 바로 뉴트로 문화다.
힙지로는 분명 흥미롭고 역동적이다. 골목골목은 설치미술 같기도 하고, 영화 세트장 같기도 하다. 실제로 홍콩배우 장만옥의 이름을 딴 식당도 있다. 그런데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저 힙지로의 본질은 인쇄업의 쇠락에 있다. 몇년 지나면 인쇄골목은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층빌딩이 들어설 것이고 그곳 어느 한쪽에서 일부 인쇄기계가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100년의 흔적을 얼마나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무참히 망가진 종로 1가 피맛골이 떠오른다.
인쇄골목 어느 건물 1층의 흰 가림막엔 ‘사교주점 8월 커밍순’이라 쓰여 있다. 사교주점이 들어서면 인쇄골목은 더 힙해지겠지만, 인쇄골목의 수명은 더 짧아지는 것 아닐까. 인쇄골목이 사라지면 힙지로도 사라질 텐데….
이광표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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