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과잉 서사 시대에 재확인한 단막극 가치
매체 다변화 시대에 단막극도 변화를 모색 중이다. 가령 지상파의 유일한 단막극 시리즈인 KBS <드라마 스페셜>은 2021년부터 TV 시네마 부문을 신설하고, 극장 상영과 OTT 선공개 등 새로운 공개 방식을 선보였다. 2017년부터 꾸준히 단막극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tvN도 변화에 합류했다.
지난해 기존의 단막극 프로젝트 브랜드명이었던 <드라마 스테이지>를 <O’PENing>(이하 <오프닝>)으로 변경한 tvN은 1부작 단막극 외에도 쇼트폼과 2~4부작 등의 형식적 변화를 꾀한 바 있다. 지난달 16일 시작된 <오프닝 2023>에서는 TV 방영 외에도 OTT 티빙을 통해 전편을 동시 공개한 방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OTT로 한 작품을 접한 시청자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면 바로 다른 작품을 잇따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단막극의 이 같은 시도들은 갈수록 심화되는 존폐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래서일까. 올해의 <오프닝>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시지는 우울한 시대를 힘겹게 견디는 존재들에 대한 응원이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제일 잘 보여주는 두 작품이 <산책·사진>과 <2시15분>이다. <산책>은 갑작스럽게 사별한 노인이 아내가 남긴 노견과의 유대를 통해 이별의 자세를 배우는 과정을 그렸고, <2시15분>은 한부모가정의 외로운 아이가 철거 예정 지역의 집에 갇혀 살아가는 아이를 만나 우정을 쌓는 이야기를 담았다.
독거노인, 학대당하는 아이, 버려진 동물 등 소외된 존재들을 향한 깊이 있고 따뜻한 시선은 본래도 단막극의 미덕이었다. 그 오래된 미덕이 새삼 더 중요해진 것은 K드라마의 글로벌 열풍 시대에 오히려 더 외면받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글로벌 OTT가 주도하는 K드라마의 인기는 한국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뒤바꿨다. 처음 OTT 업체들이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를 선보일 때만 해도 콘텐츠의 다양화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요즘에는 고자극 서사와 스펙터클 지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최근의 K드라마는 미스터리, 범죄스릴러, 액션, 로맨스, 복수 등 거의 모든 장르적 요소를 뒤섞는 뷔페식 스토리텔링을 추구하고 있다. 거대하고 다채롭고 역동적인 이야기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서 한 존재의 삶을 끈질기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이야기는 점점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오프닝 2023> 제작발표회 당시 이순재 배우가 액션 위주의 드라마 말고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필요성을 호소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순재 주연의 <산책>은 시대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듯한 작품이다. 드라마는 고집스럽고 까칠한 노인이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노견과 산책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속도전 위주의 서사가 지배하는 드라마 시장에서, 단막극이 아니었다면 꿈꿀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산책>은 이 느리고 익숙한 풍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경험을 너무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공감과 감동이야말로 가장 순도 높은 드라마 시청의 묘미라는 점을 증명해낸다.
<2시15분>도 같은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독거노인과 마찬가지로 TV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권정생 작가의 전설적인 동화 <강아지똥>에 대한 헌사와도 같은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누구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가 70여분의 드라마를 꽉 채우는 건 요즘 같은 시대에 진귀한 사례다. 억압적인 세상에서 나쁜 어른들에게 고통받는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착한 어른이 아니다. 드라마는 서로에게 기대 세상의 폭력을 견디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과거에 텔레비전은 세상을 보는 창으로 불렸다. 글로벌 OTT가 콘텐츠 시장을 주도하는 시대의 텔레비전은 점점 영화의 큰 스크린을 닮아간다. 하지만 그 거대한 풍경을 바라보는 시야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책> <2시15분>과 같은 단막극은 주류사회의 구석진 자리를 치밀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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