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한 현실 맞서면서 ‘시의 맷돌’도 놓지 않으셨죠”

한겨레 2023. 8. 1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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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팔레스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 영전에
2003년 팔레스타인 라말라 찻집에서 필자와 처음으로 만난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 오수연 소설가 제공

당신은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히 상징적이고도 원초적인” 당신의 시가 “마치 아득한 옛날 지구에 첫발자국을 남긴 첫 번째 사나이의 말처럼 느껴진다”는 평이 있었죠. 그리고 당신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여권’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첫 번째 팔레스타인인이었습니다. 그 해 2004년 외교부는 전례가 없던 터라 난감해하며 당신을 공항에 앉혀두었다가, 초청자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신원 보증을 받은 후에야 관문을 통과시켜주었습니다. 당신은 첫발을 내디뎠고, 팔레스타인과 한국 사이 문화 교류의 길을 처음으로 냈습니다. 이후로 팔레스타인의 여러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한국 시인들의 작품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팔레스타인에 소개되기도 했지요.

당신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시위 현장에서 치켜올려진 수천 개의 주먹은 어떤 의미로 불의에 항거하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주먹이기도 했다고요. 당신은 국제 뉴스에서 한국 뉴스를 유심히 보아 한국 정세를 잘 알았고, 함께 마음 졸이고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당신이 한국에 내린 폭설에 대해 물었는데, 내가 당신에게 물으려던 사안은 가슴 아프게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퍼부어진 폭격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딱 20년이네요. 2003년 팔레스타인 라말라의 찻집에서 내가 당신을 처음으로 만났으니까요.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기록하러 간 내가 현지인인 당신 앞에서 도리어 안도감을 느꼈답니다.

“나는 내 시가 바닷속에서 폭발해서, 수면에는 단지 거품만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그 거품을 보고 독자들은 저 깊은 데에서 큰 폭발이 있었음을 알아챌 겁니다. 좋은 시는 독자들 앞에서 폭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문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과 팔레스타인에서 당신을 여러 차례 만나고 번역 등의 일로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많이 배웠습니다. 현실이 너무나 무도해서 언어 따위 소용없고 절규와 분노의 고함만이 남은 것 같을수록, 당신은 시를 지켰습니다. ‘천천히 돌지만 철저하게 가는 시의 맷돌’을 꾸준히 돌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 현실 문제에 용감히 개입하고 발언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연대의 동지이자, 문학과 삶의 스승이셨습니다.

2023년 8월 2일 아침 당신이 급작스럽게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그날 저녁에 받고, 나는 급히 컴퓨터를 꺼버리는 것 말고는 아무 짓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넘은 지금도 희부연 하늘 저 끝, 아시아 대륙 건너편에 당신이 없는 세상이 낯섭니다. 올리브의 쓴 맛이 ‘삼 분의 이는 올리브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에서 나오는’ 백발의 시인이 더 이상 없는 광야를 그려볼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갇힌 하늘과 갈갈이 찢긴 땅 사이를 피점령민인 당신이 버티고 있었음을 이제 알겠습니다. 내 하늘은 기울었습니다.

‘꽃은 엄마도 아빠도 없다. 미아처럼 기차역에 서서 제 손을 잡아줄 손을 기다린다./ 꽃의 입은 몇 마디밖에 모른다. 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알기에도 충분치 않다./ 나로서는, 내가 꽃을 낳아 잃어버린 장본인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죄책감으로 울기를. 내 입에 담긴 단 몇 마디를 웅얼거리며 울기를 바란다. 그녀의 입에 담긴 몇 마디를 웅얼거리며./ 꽃은 입이 없고 타고 갈 기차도 없다.’(‘꽃’)

2009년 시인, 필자, 시인의 부인 살마. 오수연 시인 제공

나는 당신의 이 시에 나오는 꽃이 된 기분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꽃 한 송이조차 자기가 낳아서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울었던 이 세상을, 내가 어찌 감히 낯설어하겠습니까. 당신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유독 잔혹한 이 세상에 당신은 끝끝내 예의를 지켰는데, 내가 어찌 무례하겠습니까. 바로 지난 달에 당신은 시가 끝없이 솟아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당신의 시를 다른 방식으로 들어야 합니다. 끝없이 말입니다. 마침표 없이, 끝도 마지막도 없이.

“그분의 문학은 물론 남을 거야. 그런데 또 무엇이 남지? 사랑. 난 전보다 더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면서.”

비보를 전해주었던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다니아 쉬블리에게 뒤늦게 답장을 썼습니다. 자카리아 무함마드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수연/소설가

자카리아 무함마드(1950-2023)

현대 아랍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시인이자 수필가, 신화와 민속 연구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서 태어나 이라크 바그다드 대학에서 아랍문학을 전공했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국경을 막아 25년 동안 여러 나라를 난민으로 떠돌다 오슬로 협정 이후 반백의 중년이 되어서야 귀향할 수 있었다. 저명한 ‘마흐무드 다르위시 상’ 등을 받았고, 특히 한국과의 문화 교류에 힘썼다. 우리말 번역서로 시선집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2020), 팔레스타인과 한국 문인들의 칼럼 교환집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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