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결정하는 사람들[서상혁 수의사의 동물과 사회]

2023. 8. 10. 1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사이자 동물병원 그룹을 이끄는 경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물과 사람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동물의 생명과 죽음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지길 바랍니다. 게티이미지

미국의 동물용 약품 제조사 머크 애니멀헬스는 2020년 충격적인 보고서 한 건을 발표합니다. ‘미국 수의사 웰빙 연구’란 제목의 보고서는 미국의 수의사가 일반인보다 2.7배 더 많은 자살을 시도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자살 시도는 나이가 어린 수의사와 여성 수의사에게서 두드러졌는데, 보고서는 “수의사가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한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의사라면 전 세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무력감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무력감을 느낄 때가 찾아오지만, 수의사의 무력감은 조금 더 특별합니다. 대부분 ‘죽음’과 맞닿아 발현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수의사는 병들고 아픈 동물을 살리는 사람이지만, 역설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가장 많이 목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특히 중증 질환을 다루는 대형 동물병원에서 지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곤 합니다. 비록 그것이 일일지언정, 스러져 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체감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입니다.

죽어 간 생명에 대한 애달픔과 동물을 보낸 보호자의 애통함 한가운데에 수의사는 매일 서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조금 더 뛰어났다면, 어쩌면 생명을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까지 겹치면 스스로 생을 끊고 싶을 만큼 강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의사의 자살률은 어떨까요? 사람의 죽음이 주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어쩌면 수의사보다 더 높은 수치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수의사의 자살률은 의사보다 2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똑같이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데, 대체 왜 수의사의 정신적 고통은 이토록 심각한 걸까요?

다시 죽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동물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동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해 치료에 차도를 보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경우입니다. 다음은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 생을 충분히 연장할 수 있음에도 공격적인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숨을 거두는 경우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아직 죽음을 맞이할 단계가 아님에도 보호자의 선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부류도 그렇지만, 특히 세 번째 부류는 오직 수의사에게만 존재하는 죽음의 영역입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사람은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의사의 눈에는 아직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할 수 있는 강아지가 보호자의 눈엔 지금 당장 죽여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며, 보호자는 얼마든지 수의사에게 안락한 죽음을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수의사는 안락사하길 꺼립니다. 치료에 따라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의학적 근거를 들어 강하게 보호자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호자의 경제적 사정이,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사정이, 때론 너무 이른 포기가 ‘동물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미화되기도 합니다. 결국 마지막 결정은 보호자의 몫이고, 수의사는 그 결정을 따라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을 수행하는 수의사의 마음이 어떨 것 같은가요? 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동물은 말을 못 합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수의사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의학적 치료 가능성과 무관하게 어떤 동물은 스스로 안락한 죽음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인간의 연명 치료나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그토록 진지하고 치열하게 이어져 온 것에 비해, 동물의 죽음은 너무도 쉽게 허락되고 있습니다. ‘Our Business Is Killing.’ 올해 2월 SLATE라는 온라인 잡지에 실린 기고문의 제목입니다. 글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내가 수의사가 되기 전까진 왜 그렇게 수의사의 자살률이 높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동물의 생명과 죽음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지는 사회가 되길 바라봅니다. 그날이 오면 수의사가 겪는 정신적 고통도 조금은 덜어질 것입니다.

서상혁 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