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초될 위기의 군 사법질서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지난해 10월 검찰은 서욱 전 국방장관을 구속했다. 2020년 9월 어느 날 저녁 서 전 장관이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대진씨가 서해에서 북한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실과 관련된 민감한 군사기밀을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에서 삭제하도록 지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서 장관의 지시가 군사기밀 원본을 서버에서 삭제하라는 게 아니고 단지 예하 부대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정보유통망에서 삭제하라는 정도였음에도 법원은 검찰이 적용한 서 장관의 직권남용과 공용전자기록 손상 혐의를 인정했다. 이런 장면을 현 이종섭 국방장관과 국방부 공무원들도 다 지켜봤을 거다. 국방 수뇌부가 특정 사건에 감 놔라 배 놔라 개입하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인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국방부의 직권남용은 서 전 장관의 경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지난 7월19일 폭우로 실종된 민간인을 수색하다가 사망한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이하 채 상병)에 대한 해병대 조사와 관련해서 말이다. 신범철 국방부 차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해병대 수사단이 채 상병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을 비롯한 주요 직위자 8명의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사건 인계 서류를 경북경찰청에 이첩하려고 하자 “이첩을 중단하라”고 외압을 가했다. 특히 경찰 이첩 서류에 기재하게 돼 있는 과실치사 혐의자와 혐의 내용을 삭제하고, 심지어 수사라는 말도 조사로 바꾸라고 문자로 지시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너무 대담무쌍하고 노골적인 외압이다. 이 정도라면 현 국방부 수뇌부에도 서욱 전 장관과 동일한 법적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국방부 대변인실은 지난 9일 밤 출입기자들에게 “차관은 채 상병 사망사고와 관련하여 문자를 보낸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특정인을 언급한 바 없다”며 해당 보도에 “법적 절차를 취할 예정”이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발송했다. 이에 대해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은 신 차관이 해병대 사령관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를 직접 보았다고 주장한다. 문자의 존재 여부보다 중요한 핵심 문제는 국방부가 해병대 수사단장의 경찰 이첩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이다. 이첩 중단이라는 외압을 행사한 적이 없다면 왜 국방부 검찰단이 “항명 수괴”라며 해병대 수사단장을 압수수색했는가.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자 궤변이다. 국방부는 중요 혐의 대상인 해병대 1사단장을 지목해 해병대에 뭘 명령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혐의 대상자 기록을 지우려고 했던 건 사실 아닌가. 그런 명령이 아니라면 굳이 항명죄는 왜 적용했는가. 무엇이 그리 급했는가.
이미 여론은 대통령실 국가안보실과 국방부가 해병대 1사단장에 대한 수사를 차단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참사 당시에 사단장은 해병대의 대민지원을 부각하기 위해 복장 통일과 해병대원에게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무리한 임무 수행을 지시한 여러 증거가 나왔다. 이런 경우에 군이 “제 식구 감싸기”를 하지 못하도록 민간 경찰이 성역 없는 수사를 하도록 하는 새로운 군 사법제도가 적용된 지 딱 1년 지났다. 2014년의 윤승주 일병 사망 사건, 2021년 이예람 중사 사망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정착된 군 사법제도다.
우리 장병의 뼈아픈 희생을 통해 군이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할 수 없도록 한 사법질서 아래서도 국방 수뇌부가 수사를 축소하도록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면 이는 개혁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새로운 사법질서가 정착되느냐, 아니냐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 왔다. 해병대 수사단장이 항명죄로 수사받을 일이 아니라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국방 수뇌부가 직권남용으로 처벌받아야 할 일이다. 더 나아가 국방부에 외압을 사주한 대통령 안보실 관계자가 있다면 이 또한 처벌 대상이다.
국방장관이 결재했던 사건의 이첩 결정이 하루 만에 뒤집힌 사건의 진정한 배후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강력한 권력일 게다. 보직 해임이 된 해병대 수사단장은 대통령 지시대로 엄정하게 수사했던 사건에 외압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고, 만일 정상적으로 이첩이 되지 않을 경우 “정직하지 못한 해병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고 항변하고 있다. 수사단장의 변호인들은 국방부를 직권남용으로 고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를 지켜보는 희생자의 유족들은 가슴이 미어진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는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호우 피해 지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 도중 순직한 해병대 고 채아무개 상병의 유족이 언론에 채 상병의 이름을 보도하지 말 것을 해병대사령부를 통해 요청해왔습니다. 한겨레는 유족의 뜻을 존중하여 ‘채아무개 상병’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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