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고귀한 단순
세종은 간명한 글자 창조
디자인 본질에 닿아 있기에
'구호' 옷이 쉽고 우아한 것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프랭크 게리는 자신의 LA 건축 사무소 50주년에 부인과 두 아들 내외를 동반해서 한국 여행을 왔다. 가족들에게 다른 곳은 각자 다녀도 종묘만은 모두가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종묘의 정전은 동양 목조 건물 중 가장 길이가 길다. 100m가 넘는다. 용마루나 추녀마루에 멋스럽게 휘감은 곡선은 없다. 밋밋한 기와지붕이 100m 넘게 이어져 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건축물에 찬사를 보낸 세계적 건축가들은 여럿 더 있다. 거장들은 이 단순함에서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느낀 듯하다.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세종은 박연이 제작한 편경의 이칙음이 약간 어긋난 것을 느낄 정도의 음감을 갖고 있었다. 종묘제례악은 단순하다. 기본 줄기에 최소한의 장식을 붙인 느낌이다. 가만 듣고 있으면 묘하게 몰입되는 느낌이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표음문자는 페니키아 문자로부터 유래했다. 페니키아 문자는 자음으로만 구성된 가로쓰기 방식이다. 이후 그리스 문자부터 모음이 등장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모음은 자음 사이에 끼우는 보조 장치 같다. 영어의 'strike'라는 단어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글의 탄생'이란 명저를 펴낸 노마 히데키 표현을 빌리면 한글 이전의 문자들에서 모음은 자음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였다. 종착지인 한글에서 비로소 어슴푸레하던 모음에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했다. 한글은 음절의 공간을 먼저 만들고 모음을 필수로 넣고 자음 종성을 아래에 붙인 획기적 2차원 구조 문자다. '쌍스러운 문자'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한글 창제를 결사반대한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종은 "너희가 운서를 보았느냐"고 나무랐다. 희귀한 음운론까지 공부한 왕이 이데올로기에 찌든 신하들을 나무랐다. 한글은 단순하다. 음운론의 핵심에 접근하지 않았으면 이런 간명한 글자 체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쇼핑을 좋아하는 필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대표적 의류 브랜드는 KUHO(구호)다. 디자이너 정구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랜드다. 구호의 디자인은 심플하면서 우아하다. 뭔가를 더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아함과는 멀어진다. 어려운 것은 단순한 가운데 멋을 내는 것이다. 디자인의 본질에 닿아 있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 우리나라 여성복 최상위 브랜드인 르베이지, 쁘렝땅 등이 다 그런 종류의 멋을 갖고 있다.
지난 7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나흘간 한국예술주간 행사가 있었다. 음악, 문학, 무용을 아우른 대형 이벤트였다. 한류의 위력을 실감한다. 모두 무료였고 유일한 유료 행사가 '일무'였다. 종묘제례의 무용 '일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의상과 무용이 종묘라는 건축물의 심플한 스피릿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힘을 표현한 군무였다. 공교롭게도 이 행사의 연출을 맡은 사람이 구호 디자이너 정구호다. 종묘와 구호, 잘 어울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2차 대전 패전국 독일의 초대 총리였다. 핵심 산업은 해체하기로 결정되었고 4개국의 위임 통치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외교권도 잃었다. 그런 나라의 총리가 장기적인 유럽의 통일을 주장했다. 비전을 이야기한 것이다.
40여 년 후 유럽은 EU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그는 수사적 꾸밈이 없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독일의 어려움과 갈등 상황은 깊은 의미에서 균형이나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에 대해 그가 말했다. "사건, 사물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단순하지 않다. 깊이 있게 관찰하면 본질에 접근하게 되어 단순해진다." 언젠가 프로기사 박영훈 9단이 필자에게 알파고의 바둑 스타일이 '담백'하다고 했다.
라틴어 성경에 'Sanctus Simplica'란 표현이 있다. '고귀한 단순'이란 의미다. 그런 덕목이 귀해진 시대다.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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