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기자생활] 일상이 공포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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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살의 여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처음 보는 남자가 하교하던 내 우산 밑으로 뛰어들어왔다.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배우 이청아의 우산 아래로 강동원이 뛰어들어오며 해맑게 웃는 장면이 있는데, 그날 상황이 딱 그랬다.
다음날 내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입을 모아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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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손지민 | 전국팀 기자
열여덟살의 여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처음 보는 남자가 하교하던 내 우산 밑으로 뛰어들어왔다.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배우 이청아의 우산 아래로 강동원이 뛰어들어오며 해맑게 웃는 장면이 있는데, 그날 상황이 딱 그랬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회색 후드티에 검은 모자 아래 엉겨 붙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은 채 까만 뿔테안경 너머 날 쳐다보는 모습은 불쾌하고, 찝찝했으며 두렵기까지 했다.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긴 했지만 그 남자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몇살?”
비가 많이 오니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며 무례하게 접근한 남자가 내게 처음 던진 질문이었다. 열여덟살이라 답하자 그는 “딱 좋은 나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으레 하는 “좋을 때다”와 비슷한 취지라 생각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그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며 동행을 계속했다. 그러곤 세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집에 부모님 계시니?”
처음 보는 사람이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그 상황을 벗어나려 집에 부모님이 잘 계시다는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불쾌함을 넘어 무서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그 사람과 자연스레 헤어지기 위해 나도 질문을 던졌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생각하던 그는 “왼쪽”이라 답했고, 나는 냉큼 “저는 오른쪽인데,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남자는 우산을 씌워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고개를 돌려 우산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날은 처음으로 ‘우리 동네’가 무서워진 순간이었다. 우리 동네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였고, 외부인이 많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일도 드물었다. 다음날 내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입을 모아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어’라고 말했다. 위험한 상황, 큰일…. 그런 것들은 술 취한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는 유흥가나 어두운 밤 으슥한 골목길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만 알았다. 매일 걸어 다니는 등하굣길, 어린 시절부터 쏘다닌 아파트 단지에서 위험한 상황,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늘 다니던 하굣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갔다.
신림역, 서현역, 고속버스터미널…. 최근 무고한 행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 흉악 범죄가 일어났거나, 일어날 뻔했던 곳들은 모두 일상의 장소다. 나 또한 오늘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고, 지난 주말엔 옷 구경을 하러 백화점에 갔다. 하지만 이전처럼 일상을 누리기 어렵게 됐다. 서성이는 누군가를 보기만 해도 자리를 피하고, 누군가 기뻐 내지른 환호성에 사람들이 놀라 혼비백산하는 일도 이어진다. 일상이 공포로 변한 트라우마를 사회 다수가 공유하게 된 셈이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마음에 새겨진 사회적 트라우마는 치유해나가야 한다. 하나의 길은 함께 겪은 경험을 발판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 아닐까.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위해 위협이나 무력보다 공감을 먼저 생각하며 대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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