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로 풍자한 지옥도...韓 영화의 희망을 봤다

김지혜 2023. 8. 10. 13: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가수 윤수일의 히트곡 '아파트'는 프로야구 구단들이 승리의 찬가로 사용하는 노래다. 가사는 떠나가버린 연인의 아파트를 홀로 서성인다는 내용이지만, 야구장에서는 성취의 순간에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음악이 단순히 멜로디와 가사의 합이 아닌 정서까지 머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파트'가 가진 정서는 희(喜), 비(悲) 양쪽에 걸쳐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에도 희비의 순간에 이 노래가 흐른다. 주민대표로 선출된 영탁(이병헌)이 황궁아파트 주민들과 잔치를 벌이는 장면에서 그는 '아파트'를 부른다. 이때 영탁의 목소리는 뮤트(묵음) 처리되고 그의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영탁이 '선택받은 자'들이라 칭한 황궁 주민들의 춤사위가 조명(빛)에 투과됐을 때 그 모습은 악마의 그림자와 다를 바 없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선택받은 자들이 환희에 도취된 그 순간,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고 죽고 있었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성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서양에서는 아파트가 서민 혹은 빈민층 전용 주거 공간이라면 한국 사회에서는 '번듯한 집'에 대한 욕망이 투영된 주거 공간이다. 나홀로와 대단지, 복도식과 계단식, 고층과 저층 등 구조와 형태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아파트는 땅값과 결부돼 부의 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엄태화 감독이 원작 웹툰('유쾌한 왕따')의 대신 박해천 교수의 저서명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영화의 타이틀로 가져온 순간, 이 작품의 콘셉트와 메시지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 아파트를 상징하는 '콘크리트'와 천국을 뜻하는 '유토피아'의 결합은 인간을 욕망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욕망의 신기루 혹은 이면을 부각하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사회를 집약한 아파트라는 공간을 통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러낸 수작이다. '흥행 공식'이라 믿는 요상한 틀에 밀가루를 부어 이야기를 만든 듯한 요 근래의 한국 영화들과는 결이 다르다. 역량 있는 젊은 감독에게 대자본을 투입하고, 제작자가 연출가의 비전을 지지해 줄 때 나올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이 나왔다.

'재난물'이라는 장르적 특징보다는 '인간군상극'이라는 드라마에 포커스를 둔 영화다.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한 다큐멘터리를 삽입해 오프닝을 열고, 지진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시·청각적 효과로 짧게 보여준 뒤 바로 황궁 아파트 내로 진입한다.

세상이 온통 잿더미로 뒤덮인 가운데 유일하게 황궁 아파트만이 우뚝 솟아있다. 생존자들은 잘 곳과 먹거리를 찾아 황궁으로 몰려들고, 입주민들은 외부인들을 품을 것인가 내칠 것인가로 의견이 갈린다.

이때 헌신적인 자세로 재난 상황에 대처한 영탁(이병헌)이 새롭게 주인 대표로 발탁되고, 민성(박서준)과 금애(김선영)를 비롯한 대다수의 주민들이 그를 따른다. 권력을 쥔 영탁은 극환의 상황에 치닫자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고 욕망과 광기까지 드러내며 폭주한다.

세상의 종말과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결부되는 디스토피아는 인간성의 유지와 종말이라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설정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상황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인간이라는 듯 극한에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악다구니를 적나라한 에피소드와 신랄한 풍자로 그려낸다. 소재나 이야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연출의 창의성과 연기의 밀도 더해져 흥미롭고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우화가 탄생했다.

이병헌이 연기한 영탁은 중산층의 애환과 몰락을 집약한 캐릭터다. '아파트 한 채'에 대한 꿈이 무너진 서민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재난 상태를 강렬한 연기로 표현해 냈다. 그간 수많은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지만 이번 영화 속 얼굴은 유독 낯설다. '연기 기능장'에 가까운 연기력이 매력적인 캐릭터와 뛰어난 연출력과 만나 빛을 발했다.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는 영탁과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이 부부는 세상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이타심을 잃지 않으며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불가항력의 재난 앞에서 내가 살기 위해 혹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인간 군상들은 어느 캐릭터에 나를 대입해 봐도 납득이 된다.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는 반면 고구마 캐릭터도 있고, 민폐 캐릭터도 있다. 다양한 인간들의 얼굴을 보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편 영화 '숲'(2012)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뒤 '잉투기'(2013), '가려진 시간'(2016) 등으로 가능성을 보여준 엄태화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연출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220억 대의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을 처음으로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무게와 재미의 압박에 휘둘리지 않고 뚝심 있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특히 촬영과 조명, 미술과 음악을 절묘하게 활용해 영화가 끝나도 쉬이 잊히지 않을 인상적인 장면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여름 텐트폴 영화라기엔 어둡고 우울하다고 볼 수도 있다. 화끈한 액션과 포복절도한 웃음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류는 영화는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완성된 밀도높은 드라마는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발한다.

영화는 오락인 동시에 예술이다. 예술엔 어떤 경계나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영역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극단적 리얼리즘과 자비 없는 비극을 응원한다.

ebada@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