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직장인' 김대호에겐 있고 'K-예능인' 전현무에겐 없는 것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MBC 예능 '나 혼자 산다'는 2013년부터 방송됐다.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주며 인기를 끌기 시작해 벌써 10년이나 간판 예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현무·박나래·기안84 등 원년 멤버를 중심으로 그동안 수많은 스타들이 거쳐서 갔고, 최근에는 코드 쿤스트·샤이니 키·이장우 등이 자주 얼굴을 비치고 있다.
'나 혼자 산다'의 인기 비결은 연예인들의 일상을 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거실과 주방은 물론 침실 안에까지 설치된 관찰 카메라가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비춘다. 헝클어진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밥을 챙겨 먹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깊숙하게 집안으로 파고든 카메라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뭘 먹고, 뭘 입는지, 어디서 놀고, 누구와 만나는지를 보면서 자신이 마치 그들과 함께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연예인이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일상에서는 그들도 "일반인(시청자)과 다를 것 없이 하루 삼시 세끼 먹는데 진심인 사람"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크게 공감했다.
하지만 듣기 좋은 노래도 무한 반복되면 질리는 법. 매번 유사한 일상이 되풀이되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10%를 오르내리던 '나 혼자 산다'의 시청률은 7%선까지 주저앉았다. 전현무·박나래·이장우가 '팜유즈'라는 트리오를 형성해 일부러 과장되게 '먹방'을 하지 않는 한, 하향 추세의 시청률을 되돌리긴 쉽지 않았다. 멋지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자아내는 호기심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이미 '특별한 연예인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패턴에 피로감을 느꼈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새 얼굴이 김대호 아나운서다. 김대호는 지난 4월 21일 방송된 491회에 처음 등장했다. 교양 프로그램인 '생방송 오늘 저녁'을 진행하는 MBC 아나운서로 소개됐다. 아나운서라면 우선 갖게 되는 선입견이 있다. 단정한 정장 패션, 부드럽고 깔끔한 외모, 똑 부러지는 언행. 그러나 MBC 퇴근 후에 펼쳐지는 김대호의 일상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서울 종로구 인왕산 자락의 오래된 단독주택에 홀로 살면서 집안에는 도마뱀과 물고기, 각종 식물이 들어찬 비바리움을 재배하고 있고, 외부 옥상에는 '혼술'을 즐기는 나만의 포장마차(일명 호장마차)까지…. 옥상 포장마차에 올라가 셀프 조리한 음식으로 얼음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에 시청률이 7.9%로 뛰었다.
6월 9일 498회 방송에선 직접 튜닝한 캠핑카를 선보였다. 2년 전에 단종된 소형 밴인 중고 다마스였다. 감성 캠핑을 한다며 좁디좁은 밴을 개조하고 급기야는 그 안에 드러누워 꿀잠을 즐기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다시 한 번 열광했다. 오후 근무 시간이 다가오자 출근하기 싫어서 끙끙 앓는 'K-직장인'의 모습이 매우 '리얼'했다. 시청률은 다시 8.5%로 올랐다.
지난 7월 21일 504회 방송은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김대호는 나만의 바캉스를 즐기는 신통한 방법까지 보여줬다. 최고의 닭백숙을 만들기 위해 시장에서 닭과 재료를 사고, 약수를 길어오는 모습이 무척 진지했다. 게다가 집 마당에 어린이용 풀장을 설치해 물장구를 치는 모습은 기가 차면서도 그럴듯했다. 자신만 만족하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도 행복이 된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는 것 같았다. 시청률은 최근에 보기 드문 9.0%, 순간 시청률은 11%까지 치솟았다.
방탄소년단 같은 월드 스타도, 인기 절정의 트로트 가수 임영웅도, 톱 MC 전현무의 코믹한 변신도 아닌 월급쟁이 아나운서 김대호가 기대 이상의 공감을 얻은 원동력은 뭘까.
그건 바로 K-직장인의 전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침 출근이 매번 버겁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고민. 나만 힘든 것이 아니며 서로 일하는 분야가 다를 뿐 업무 스트레스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 직장인들이 가지고 있던 현실의 고민과 갈등은 너무나 익숙해서 무시되거나 혹은 당연시됐던 것들이다. 그러니 새로울 것도, 궁금할 것도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직장인의 애환을 대변하고 이를 슬기롭게 풀어가는 김대호의 일상은 톱스타의 그것보다 훨씬 큰 공감을 얻었다. 연예인의 짜인 패턴에서 벗어나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모습으로 샐러리맨의 예산에서도 접근 가능한 판타지와 로망을 경제적으로 실현했다.
집안의 포장마차는 매우 이색적이지만 만드는 데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린이용 풀장을 설치하면 많은 돈 들이지 않고도 집을 나만의 풀빌라로 변신시킬 수 있다. 물론 단독주택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스타 연예인의 일상은 엿보고 싶은 호기심은 있지만 거기까지다. 따라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20∼30대의 나이에 강남의 30평대 아파트나 빌라에 살 수 있는 청춘은 많지 않다. 물론 좁은 원룸에 사는 출연자도 나오긴 하지만 대개는 소비 지출에 구애받지 않고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럭셔리카를 타고 이동하며, 남들은 근무할 것 같은 시간에 자유롭게 캠핑을 떠난다. 이를 보는 것은 재미있다. 정신적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쉽게 이룰 수 있는 현실은 아니다.
K-직장인 김대호는 처음부터 이런 게 다 필요 없었다. 대신 조금의 창의력과 약간의 손재주, 부지런한 발품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다. '트민남(트렌드에 민감한 남자)'이라는 그럴듯한 콘셉트 속에서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물건을 구매하는 전현무의 일상과는 '가성비'부터 다른 것이다.
흔히 MZ 세대들이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고, 씀씀이가 헤픈 것으로 오인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 '가성비'에 민감하다. 더구나 요즘처럼 살인적인 고물가의 시대에선 김대호 같은 출연자가 오히려 현실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대호의 출현은 '나 혼자 산다'의 터줏대감 전현무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한때 K-직장인의 대명사였던 전현무는 이제 웬만한 톱스타를 능가하는 전천후 예능인으로 성공했다. 이미 지난해 MBC 연예대상을 받았을 만큼 MC 이상의 대중적 스타가 됐다.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는 '무지개 회원'(출연자)을 이끄는 회장을 맡고 있다. 프로그램의 리딩 캐릭터이고 회식 자리의 물주다. 최근엔 '팜유즈'를 구성해 박나래·이장우와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현무의 '무기'는 충분한 경비다. 전현무는 '먹방'이든 '쿡방'이든 여행이든 목표 달성을 위해선 돈을 아끼지 않는다. 얼마전 '팜유즈'가 목포를 방문해서 종일 먹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일반인 누구나 들르는 지역 맛집에서 밥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3명의 식대가 적지 않아 보였다. 물론 설정에 따른 것이고, 프로그램 제작비에서 충당됐겠지만 만일 그 일정을 일반인이 따라 한다면 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을 것이다.
최고의 MC 전현무의 회당 출연료는 약 1000만∼1500만 원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에 방송 출연료만 약 3억 원이고 연간 수입은 4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김대호의 MBC 차장 연봉은 약 8000만∼9000만 원. 일반 직장인치곤 적지 않은 연봉이지만 전현무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연봉 40억 원과 연봉 8000만 원이 접근 가능한 소비는 애초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전현무는 따라 할 수 없지만, 김대호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하다.
더구나 김대호의 그것은 가격을 초월해 따라 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가 막걸리잔에 얼음을 띄워 마시면 그렇게 해보고 싶고, 유아풀을 만들어 뛰어들면 아파트 욕조 찬물에라도 몸을 담그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아마 주말에 김대호식 닭백숙에 도전한 시청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김대호의 K-직장인 마인드가 당분간은 계속되길 바란다. 그래서 웃고 공감하는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도 프리랜서가 되면 곧 사정이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왜 자신의 이야기가 시청자에게 통했는지 안다면 K-직장인의 고민을 쉽게 저버리진 못할 터. 김대호의 일상을 보면서 전현무가 유난히 부러움과 감탄의 표정을 지었던 것이 인상 깊다. 김대호에겐 아직 남아 있는 게 전현무에게선 오래 전에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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