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들』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이란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8. 1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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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나이팅게일에게 첫 레슨을 받고 있는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조용한 메트로놈을 바라보며, 그 조용함이 기쁨을 주기라도 하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첫 음들이 울렸을 때 미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천재와 함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9쪽)

평생 독신으로 산 오십대 초반의 여성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산다. 어느 날 천재적인 소년이 그녀의 제자로 들어오고, 소년의 연주는 나이팅게일을 파라다이스로 이끈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는 천재적인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 미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다. 소년은 연주로 황홀함을 안겨주지만, 미스 나이팅게일은 소년이 레슨을 다녀가면 물건이 하나씩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서 괴로움과 당혹감에 시달린다. 솟구치는 수많은 괴로움과 당혹감, 온갖 기만과 의심들⋯. 세월이 흘러서 훌쩍 커버린 소년이 다시 찾아와 곧장 피아노 앞에서 그녀를 위해 연주를 시작한다. 그녀는 소년의 연주를 보고 들으면서 비로소 불안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 자체가 하나의 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미스 나이팅게일은 그를 바라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깨달았다. 그 미스터리 자체가 경이였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이 사랑과, 혹은 천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만 너무 골몰했으니까. 균형은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충분했다.”(17쪽)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말년에 창작한 열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유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들』(문학동네)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이번 소설집에도, 그의 이전 소설들처럼, 영웅이 아닌 평범해 보이는 소시민이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천재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피아노 선생의 제자」), 칠장이들에 의해 희미하게 죽음이 알려지는 장애인(「장애인」), 남편과 친구의 불륜으로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은 출판사 관계자(「다리아 카페에서」), 환경미화원에게 시신으로 발견된 중년 부인(「크래스소프 부인」), 기억 장애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그림 복원가(「조토의 천사들」)⋯.

2016년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트레비가 마지막 소설에서 그린 인간과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문학적 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유작 소설집과 문학적 여정을 살펴봤다.

작품 「장애인」은 농장에서 함께 살던 오십대 여성 마티나와 먼 친척뻘인 장애인 남자의 이야기다. 영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떠돌이 칠장이 형제는 어느 날 장애인과 농장의 집을 페인트칠하기로 합의한다. 페인트칠은 한동안 중단됐다가 비가 그치면서 재개되지만,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함께 살던 여성이 서둘러 집을 떠나고 장애인이 숨진 것으로 보이지만, 칠장이 형제는 페인트칠을 마저 끝낸다.

“그녀의 처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듯, 그들의 처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가 채찍을 손에 쥔 건 그게 그녀가 잡을 수 있도록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드시 연금이 계속 나오게 할 것이다. 장애인을 그리워할 사람도, 호젓한 곳을 찾아올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일 그 여자는 페인트칠 값을 치를 것이다. 내일 그들은 다시 여행길에 오를 것이다.”(42쪽)

「다리아 카페에서」의 주인공은 남편이 자신의 절친과 불륜을 저질러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은 작고 가냘픈 여성 애니타 라이드다. 인기 댄스그룹 멤버였던 애니타는 열아홉 살에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남편이 친구 클레어와 불륜을 맺으면서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는다. 사건 이후 긴 시간이 흐르면서 중년에 접어든 애니타는 출판사 원고 검토자로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어느 날 클레어가 다리아 카페에 있는 그녀를 찾아와 남편의 부고를 알린다. 애니타의 삶에 다시 파문이 일지만, 더 이상 그녀를 흔들어놓진 못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랑 이전의 우정을 떠올리게 되는데.

“애니타는 늘 앉는 자리에서 폭력 범죄와 힘겨운 사랑, 인간의 나약함과 구원, 고통과 치유에 대한 글들을 읽는다. 가끔 고개를 들면 돌아온 클레어가 보인다.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잠시 클레어가 거기 있다⋯ 집을 판다는 표지판은 치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 산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대 있었던 모든 것을.”(64쪽)

사랑하는 아내와 다툰 후 화가 나서 과속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일으켜 아내를 죽게 만든 레이븐스우드씨의 죄책감과 그를 유혹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젊은 은행원 로잰을 그린 「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 돈을 보고 결혼한 늙은 남편이 죽자 과부의 삶을 즐기기로 결심한 크래스소프 부인이 맞이한 파국을 묘파한 「크래스소프 부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를 짝사랑하면서 중년의 위기를 겪게 된 비니콤씨의 이야기를 담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기억 상실증에 걸려 조각난 기억들 사이를 표류하는 그림 복원가 콘스탄틴 네일러를 그린 「조토의 천사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은 각자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 속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편들은 각 20쪽 내외에 불과하지만, 삶이 뿜어내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예리하게 포착돼 있다. 쉬운 듯 하면서도 쉬이 내달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완성도 높은 문장과, 마치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창밖에서 벌어지는 폭풍우를 바라보는 듯한 거리감⋯.

얼굴에 물결치는 듯한 주름이 인상적인 트레버는 살아 있는 동안 “현존하는 영어권 작가 중 가장 뛰어난 단편작가”(『뉴요커』)라는 찬사를 받았던 단편소설의 거장이었다. 체호프, 모파상, 조이스의 뒤를 잇는 작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소년은 아니었다. 대신 도서관이나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이방인 같은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가,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서 학교를 열세 군데나 옮겨 다니는 부평초 같은 생활을 했다. 부모마저 불화하면서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냉랭했으니 그를 구원해준 것은 현실이 아닌 책이나 예술문화 같은 것이었다. 열 살 무렵부터 탐정소설을 탐독했고 스릴러 작가를 꿈꿨다고, 그는 나중에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아주 어렸을 때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스릴러의 훌륭한 독자였어요. 열 살 때, 나는 스릴러를 쓰고 싶었지요. 나는 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고⋯.”

더블린의 기숙학교 세인트 컬럼버스 칼리지에서는 미술 교사 오이신 켈리(Oisin Kelly, 1915―1981)의 영향으로 조각에 심취했다. 아울러, 친절한 영어 선생을 만나서 글쓰기의 묘한 매력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영어 선생은 학생들에게 에세이 과제를 내주곤 했다. 그는 그럭저럭 선생이 내준 주제에 맞춰서 다뤄서 글을 썼다. 그런데 그것은 에세이라기보다는 늘 하나의 스토리였다. 하지만 선생은 그의 글쓰기를 격려해줬다. 글쓰기는 그에게 새롭게 흥미로운 취미가 됐다. 시를 읽고 쓰던 친구들과도 교류하게 됐다. 다만, 그럼에도 이 시기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나중에 『파리 리뷰』에서 회고했다. “미술 대가의 영향으로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고, 사실 (칼리지) 말년이 되기 전까지는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죠. 학창시절에는 글을 전혀 쓰지 않았어요.”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1952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만난 제인 라이언과 결혼했다. 졸업 뒤에는 북아일랜드의 작은 학교에서 선생으로 근무하며 조각가로도 활동하다가 불황의 여파로 1954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학교 교사와 조각가의 생활을 병행하면서 글쓰기를 모색하던 그는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 제임스 조이스, 찰스 디킨스 등의 소설을 읽었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스릴러와 탐정소설을 졸업하고 A. J. 크로닌과 프란시스 브렛 영, 세실 로버츠 같은 중년 작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이 경이롭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들에서 항상 존경했던 서머셋 몸, 특히 그의 단편 소설로 옮겼고, 읽지 않고 있었던 아일랜드 작가들을 읽기 시작했지요. 어떤 이유로 아일랜드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했어요. 아마도 그들이 국내 작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조이스로부터 시작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디킨스와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을 읽었습니다. 나는 굶주리고 즐겁게 읽었고,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그 이후 깨달았지요.”

그리하여 1958년, 그는 첫 번째 소설 『행동의 표준(A Standard of Behaviour)』을 발표했다. 금전적 이익을 노리고 쓴 소설이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그는 나중에 고백했다.

“제가 아주 가난했을 때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쓴 단편소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The Old Boys)』 이전에 쓴 나의 첫 번째 소설이지만, 『동창생들』은 내가 쓴 첫음으로 진지하게 쓴 소설이었지요.”

1928년 아일랜드 코크 카운티의 미첼스 타운에서 태어난 윌리엄 트레버는 1958년 소설 『행동의 표준』에 이어서, 1964년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로 호손덴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는 이후 수백 편의 단편소설과 18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장편소설로 『딘머스의 아이들』, 『운명의 장난감』, 『펠리시아의 여정』, 『여름에 죽다』, 『루시 골트 이야기』, 『여름의 끝』 등이, 단편소설집으론 『우리가 케이크를 먹고 취한 날』, 『비 온 뒤』, 『카드놀이 속임수』 등이 있다. 휫브레드상(Whitbread Prize, 현재 코스타상)을 세 번 수상했고, 오헨리상을 네 번 수상했다. 부커상 후보에 5번이나 올랐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거론됐다. 1999년에는 영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데이비드 코언상을 받았다. 줌파 라히리,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럴 오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편소설 작가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던 트레버는 1989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단편소설을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art of the glimpse)”이라고 정의했다. 장편소설이 복잡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이라면, 단편소설은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준 찰나의 장면을 포착해 주관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는 인상파 그림이라고. 진실이 폭발하는 순간을 포착해 영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단편소설)이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편)소설이 복잡한 르네상스 그림과 같다면, 단편소설은 인상파 그림입니다. 그것은 진실의 폭발이어야 하죠. 그것의 힘은 넣는 것만큼이나 빼는 것에 있어요. 그것은 무의미함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인생은 대부분 시간이 무의미합니다. 소설은 그러한 인생을 모방하지만, 단편 소설은 앙상하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예술입니다(I think it is the art of the glimpse. If the novel is like an intricate Renaissance painting, the short story is an impressionist painting. It should be an explosion of truth. Its strength lies in what it leaves out just as much as what it puts in, if not more. It is concerned with the total exclusion of meaninglessness. Life, on the other hand, is meaningless most of the time. The novel imitates life, where the short story is bony, and cannot wander. It is essential art).”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그래서 영웅이 아닌 힘없는 소시민이나 소외된 이들이다. 변덕스런 운명과 불공평한 싸움을 벌이는 중하위 계층의 아랫단에 매달린 서발턴들이다. 왜 영웅을 그리고 창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영웅은 단편소설에 맞지 않는다고,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답했다.

“나는 그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웅은 실제로 단편 소설에 속하지 않아요. 프랭크 오코너(Frank O'Connor)가 말했듯이, 단편 소설은 작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는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비영웅적인 면이 성공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Because I find them dull. Heroes don’t really belong in short stories. As Frank O’Connor said, “Short stories are about little people,” and I agree. I find the unheroic side of people much richer and more entertaining than black―and―white success).”

그는 삶의 어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지점을 주목하는 한편, 삶의 사건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을 주목했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삶의 국면을 극복해내거나 아니면 극복하지 못하고 삶의 희생자로 남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1964년 『동창생들』로 호손덴 문학상을 받은 이후 전업했고 1971년 영국의 시골 마을 데본으로 이사한 이래, 트레버는 죽기 직전까지 쓰고 또 썼다. 처음 새벽 4시나 4시30분쯤 일어나 아침 식사 시간까지 마치 형벌을 받듯 썼다가, 나중에는 오전 8시에서 낮 12시까지. 타자기로 쓴 글을 자주 리필했고, 글을 다 쓰면 타자된 글을 가위로 잘라냈다.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어떤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기 위하여. 포착된 순간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창조하기 위하여. 그 인상들로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참고문헌
―Mira Stout, Spring 1989, William Trevor, The Art of Fiction No. 108, The Paris Review, Issue 110, Spring 1989.
https://www.theparisreview.org/interviews/2442/the―art―of―fiction―no―108―william―trevor.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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