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은 청춘의 추억이 담긴 노선이다. 주말 아침부터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경춘선 열차를 타고 대성리, 가평, 강촌 등지로 MT(Membership Training)를 가는 풍경은 디젤 기관차가 다니던 수십 년 전부터 전철이 지나는 지금까지 한결같다.
경춘선에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역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 철도 최초로 역 이름에 인물명이 들어간 김유정역이다. 본래 이곳의 이름은 1939년 지어질 당시에는 역이 있던 신남면에서 따온 신남역이었다. 이후 2004년 춘천시의 요청에 따라 역 바로 앞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빌려 새롭게 태어났다.
몇 년 전부터 불어온 소위 레트로(Retro) 열풍이 식지 않고 있는 지금, 수십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김유정역 주변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옛 정취와 문학의 향기가 함께 살아 숨 쉬는 김유정역 인근 명소들을 직접 다녀왔다.
김유정역 구 역사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5
현재 사용하고 있는 김유정역의 역사(驛舍)는 기와집 형태에 모든 안내표지의 글자가 궁서체로 적혀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2010년 전철 개통과 함께 문을 연 이 역사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80년 전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구 역사가 여행자들을 반긴다.
역사의 크기는 다소 아담하며 외벽은 알록달록한 벽화로 꾸며놓았다. 한쪽 벽 앞 작은 화단에는 색색의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내부로 들어가면 과거 이곳이 역사로 기능하던 당시의 사진 자료들과 함께, 역무원들이 사용하던 장비, 착용하던 제복, 업무일지와 승차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 옆에는 방문자들이 여러 문구를 적은 종이를 걸어둘 수 있는 게시판이 있다. 게시판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벽면에까지 빼곡하게 적힌 글귀에서 사람들의 추억과 마음이 전해진다.
역사 앞 현재 쓰이지 않는 플랫폼과 철로는 산책로, 포토존,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플랫폼에 세워진 디젤 기관차 7160호와 무궁화호 객차 2량이 인상적이다. 무궁화호 객차는 춘천 관광안내소와 북카페로 개조했으며 디젤 기관차는 행사가 있을 때 개방한다.
북카페라는 이름에도 내부에 별다른 음료나 급수시설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제법 감성을 자극한다. 특히 차창 밖으로 경춘선 전철이 지나갈 때는 낯선 여행지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시민들이 기증한 시집과 소설책, 수필집 수백 권이 객실 선반을 채우고 있다. 입장료가 전혀 없는 열린 공간이니만큼 김유정역에 왔다면 한 번 들러보자.
김유정문학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0-14
김유정역 구 역사를 나와서 5분만 걸으면 강원도 제1호 공립문학관인 김유정문학촌을 만날 수 있다. 1908년 작가 김유정이 태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여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방문객들을 위해 꾸며놓은 정원을 지나 낮은 계단을 오르면 교과서에 나올법한 전형적인 초가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120년 된 건물은 아니나 문학촌이 문을 연 2002년 김유정 작가의 조카 김영수 씨, 김유정 작가가 세운 야학 금병의숙 제자들의 고증을 거친 만큼 복원 정도가 탁월하다.
생가 옆에는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둔 기념전시관이 있다. 문학인의 기념관 치고 유품은 많지 않고 그의 삶을 요약한 그림과 작품 초판본 등이 대다수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김유정 사후 그의 유품은 죽기 직전까지 편지로 긴밀하게 교류했던 친구 안회남이 맡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그가 1947년 즈음 월북하며 유품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덕분에 교과서에도 실린 김유정의 글은 현재 우리나라 어디에도 그 흔한 원고 한 장이 없다.
생가 맞은편에 있는 김유정이야기집은 기념전시관과 비슷한 내용을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활용해 좀 더 현대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이다. 동료 작가인 이상과의 인연에 관한 영상 자료, 죽어가던 김유정이 광주 누님댁에서 지내던 시절의 방을 구현한 코너가 인상적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문서, 떡살 등 문학촌 소장품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관과 애니메이션화 한 김유정의 소설을 상영하는 영상실 등이 있다.
문학촌 초입에 있는 무료시설 낭만누리 기획전시실에서는 지난 달 11일부터 ‘김유정 읽는 여름’이 열리고 있다. 무더운 여름 휴식공간이 마땅치 않은 문학촌의 현실을 고려해 느긋하게 김유정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중앙에는 방문객들이 작품을 필사할 수 있는 칸막이 책상이 있다. 예상 이상으로 인기가 많다는 설명대로 책상 여기저기 붙은 필사본의 수가 제법이다.
매년 가을이면 생가 지붕을 덮은 볏짚을 교체하는 이엉 갈이 행사가 열리고 문학촌에서 내는 문예지의 새로운 판본을 배부한다. 열기가 누그러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다시 찾아와봄 직하다.
책과인쇄박물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동면 풍류1길 156
김유정 문학촌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주위의 정겨운 시골 풍경과 동떨어진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2015년 문을 연 책과인쇄박물관이다. 그 이름처럼 건물 모양은 책장에 꽂힌 책을 닮았는데 이는 박물관의 로고와 입장권에도 반영했다.
입구로 들어가면 카페 겸 접수처가 나온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왼쪽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전시관이 시작한다.
1층은 박물관의 주제인 책과 인쇄 중 인쇄를 담당하는 전시실이다. 들어서자마자 잉크 냄새, 오래된 금속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수만 개의 납 활자와 조판대, 주조기를 비롯해 활판 인쇄기들을 크기 별로 전시 중이다. 안쪽에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인쇄공소를 그대로 재현하고 그곳에서 펴낸 책들을 함께 전시해 생동감을 더한다.
2층은 고서 전시실이다. ‘삼강행실도’, ‘주역’, ‘중용’부터 ‘삼국지’, ‘춘향전’까지 우리나라 초기 인쇄문화를 대표하는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3층의 근현대 책 전시실은 방문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이 가득하다. 김유정의 ‘동백꽃’, 박태환의 ‘천변풍경’ 같은 개화기 소설부터 40~50대의 학창 시절 교과서, 옛날 만화책과 각종 잡지를 전시 중이다. 학생들이나 젊은 층이라면 부모님과 방문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이다.
책과인쇄박물관은 전시 외에도 자신이 원하는 글을 원고지에 적어 활자를 문선, 조판하여 손으로 인쇄하는 엽서 만들기를 포함해 6종의 다양한 상설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입장료는 인당 6000원이며 운영시간은 4~10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그 외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다. 입장권은 책갈피로 쓰기에도 좋고 춘천시 주요 관광지에 제시하면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여러모로 유용하다.
카페 더 웨이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동면 풍류1길 72
요즘 날씨는 가히 극한의 더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렬한 햇빛에 습기까지 더해져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삽시간에 힘이 빠진다. 카페 더 웨이는 다음 행선지로 향하기 전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몇 년 전부터 수도권 근교에서 대형 카페가 유행이어서인지 이곳 역시 척 보기에도 규모가 쾌 크다. 총 2개 층에 온실, 계단, 테라스, 루프톱까지 여러 좌석이 있어 각각에서 찍은 사진만 보면 전부 하나의 매장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여기에 드넓은 잔디 정원까지 있어 카페라기보단 부자의 시골 별장 같은 느낌이다.
갤러리형 카페를 표방하고 있어 분기마다 회화전을 연다. 현재는 윤선홍, 정수경 작가의 작품들로 ‘그해 여름은’이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곳곳에 걸어 놓은 그림에 담긴 꽃과 녹음이 매장 안 실제 식물들과 어우러지며 실내 전체에 생기를 더하고 있다.
1층에는 꽤 본격적인 포토부스가, 2층에는 영수증을 넣으면 작동하는 즉석 사진기가 있다. 손님들이 남긴 사진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진마다 가득한 미소에 보는 사람까지 행복해진다.
가게에서 원두를 직접 볶는 로스팅 카페답게 커피 맛이 좋다. 음료 말고도 미니 크로플에 9가지 소스를 제공하는 크로플 팔레트 등 배를 채울 수 있는 메뉴도 많다. 지치기 쉬운 요즘 날씨 속 이 주변을 여행할 때 꼭 들러보자.
전상국 문학의 뜰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동면 풍류1길 84-6
카페에서 나와 언덕을 조금 더 오르다 보면 별안간 울창한 숲에 들어온 듯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 길목을 따라가다 보면 김유정문학촌의 초대 촌장이자 단편소설 ‘우상의 눈물’로 유명한 소설가 전상국이 세운 문학관, 문학의 뜰에 도착한다.
노출 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외관은 문학관이라기보다 현대미술관을 떠오르게 한다. 총 3층 구성으로 방문객은 2층 사무실과 집필실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을 둘러볼 수 있다.
1층에는 안내소와 함께 책곳간이라는 대형 서재가 있다. 적어도 6m는 될법한 서재를 수많은 책이 가득 채운 모습은 사진에 다 담기지 않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여기엔 전상국 작가가 대학생 시절 헌책방에서 모은 여러 문예지 초본부터 평양에서 열린 남북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해 구해온 북한의 문학 작품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 모여있다. 그 양만 해도 약 2만 권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에 저자 자필 서명이 적혀있다. 책장에 있는 책은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지하 1층은 전상국 작가의 작품세계, 일생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전시실이다. 사각형의 전시실은 벽을 따라 총 네 구역으로 구분하며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감상하면 된다. 이중 전시관 입구 바로 오른편 ‘전상국 작품 깊게 알기’ 공간은 특히 인상 깊다. 각 작품의 한 대목을 적어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아크릴판으로 흥미를 느꼈다면 바로 옆 체험공간에서 음성을 동반한 전자책으로 작품에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다.
3층 전망대는 얼마 전 빗물로 인한 낙상사고가 발생해 잠시 닫혀있다. 미끄럼 방지 대책을 마련해 가을 전에는 다시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때는 김유정이 자신의 수필에서 “옴팍한 떡시루 같은 모양”이라 묘사한 마을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