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실의 고수와 장수] 서울 거리엔 왜 노인들이 잘 보이지 않나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다. 나는 그의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판 출간을 계약하고 편집하면서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 200여 명을 직접 인터뷰해 여성의 목소리로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한 책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어판 출간 직후 알렉시예비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을 때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생중계가 끝난 후 파도처럼 문의 전화가 밀려들어왔다. 편집자로서는 꿈같은 일이었다.
더욱 꿈같은 일은 얼마 후 알렉시예비치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작가가 남긴 문장과 그 행간까지도 살피며 책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한 권의 책을 편집하는 일은 곧 작가와 함께한 시절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외국 작가 책 편집을 할 때는 작가를 직접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 글 너머의 작가를 상상하고 그저 그리워하는 수밖에 없다. 내게 온전히 허락된 알렉시예비치와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가까이서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한순간이 영영 잊히지 않을 기억이 되리란 것을 알았다.
알렉시예비치는 부드럽고 진중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을 찾아다니고, 온갖 검열과 소송에도 굴하지 않고서 끝까지 자신의 책을 지킨 집념의 전사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초록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그가 책을 써내려가기 위해 지켜온 신중한 태도,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에 직접 뛰어든 여자들의 가슴속에 비밀리에 묻혀 있던 그 피와 죽음의 현장을 끌어내기 위해, 대뜸 펜과 녹음기를 들고서 지금 당장 전쟁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인터뷰이를 다그치지 않았다. 알렉시예비치는 그저 붙들어야 할 기억과 이야기를 가진 사람의 일상 공간에 찾아가 함께 차를 마시고 손자들 사진을 보며 웃고, 새로 산 블라우스를 칭찬하며 한동안 그들 곁에서 살아갔다. 부엌의 싱크대처럼, 식탁에 놓인 화병처럼 그냥 묵묵히 함께 있어주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여자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그날의 기억에 대해 절로 입을 열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이면 오히려 여자들이 알렉시예비치에게 눈물 흘리며 부탁했다. “와요, 꼭 다시 와야 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살았어. 40년이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았어….”
그는 낮은 목소리를 지닌 고요한 어른이었다. 어른이 될수록, 또 세상의 권위와 명예가 쏠릴수록 작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하는 사람이 드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는 자신을 고요한 그릇으로 비워내어 세상 사람들의 눈물과 기억을 받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한낮에 서울의 번화가를 지날 때도 그는 휘황한 거리 풍경에 감탄하기보다는 내게 그저 이렇게 물었다. “서울 거리엔 왜 이렇게 노인들이 잘 보이지 않나요? 온통 젊은 사람들만 거니네요. 노인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번화가의 카페, 상점, 맛집들을 채우고 있는 젊은이들. 역시 그 젊은이 중 하나인 나는 한낮의 화려한 거리에 왜 노인들은 잘 보이지 않는지, 나의 부모 세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70대의 노장 알렉시예비치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전쟁과 인간의 온갖 비극과 참혹을 통과해온 그가 향하는 곳은 결국 사랑이었다. 당장 계약하고 싶을 만큼 탐난다고 편집자 근성을 발휘해 졸랐더니, 그는 그 책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만나야 하므로 책이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라고, 그러나 ‘사랑의 책’을 완성한 후 꼭 다시 만나자며 미소 지었다.
그후 나는 알렉시예비치가 발표할 ‘사랑의 책’ 소식이 궁금해 종종 뉴스를 검색해보곤 했다. 벨라루스 정부의 전쟁 지원과 독재에 반대하는 그의 자택 앞엔 알렉시예비치 납치를 도모하는 괴한들이 어슬렁대고, 그는 견디다 못해 고향 벨라루스를 떠나 유럽으로 망명했다고 했다. 인류의 온갖 죄악과 전쟁을 기록하던 그의 몸과 삶은 여전히 슬픔과 폭력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고 싶다. 타지에서도 그가 그 푸른 눈으로, 낮은 목소리로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최후의 사랑의 조각들을 모으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사랑의 책’을 들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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