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 가장 멋진 독재자”… 중남미 ‘부켈레 신드롬’
짙은 선글라스, 뒤로 돌려 쓴 모자, 가죽 재킷, 청바지. 요즘 중남미 국가 유력 정치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나이브 부켈레(42) 엘살바도르 대통령의 폭발적 인기가 자국을 넘어 중남미 전역으로 확산하자 너도나도 그의 스타일 따라 하기에 나선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살인율을 기록하던 엘살바도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초강력 범죄 소탕 작전을 이끌고 있는 부켈레가 중남미의 벼락 스타로 떠올랐다. 만성적 치안 불안에 넌더리를 내던 각국 국민들이 그의 불도저식 통치 스타일에 환호하는 가운데, 새로운 독재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2019년 6월 취임한 부켈레는 지난달 차기 대선 출마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앞서 2021년 대통령 중임은 가능하되 연임을 금지한 선거 규정이 대법원과 선관위 결정으로 백지화됐다. 부켈레는 소셜미디어 계정에 자신을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로 소개하고 공개적으로 재선 의사를 밝혀왔다. 점잖고 그럴싸한 단어로 자신들의 의도를 숨기는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거침없이 권력욕을 드러내는 그의 지지율은 경이적 수준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부켈레 정권을 지지한다는 응답률은 93%에 달했다.
지난해 3월 범죄를 뿌리 뽑겠다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공권력을 동원해 갱단 소탕 작전에 나서면서 지지율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노 두라(철권통치·mano dura)’라고 불린 작전으로 성인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약 7만명이 교도소에 수감됐다. 경찰이 갱단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체포된 피의자들을 수용할 중남미 최대 규모의 교도소도 신설했다. 일단 때려잡고 보는 식의 범죄 소탕 작전에 인권 탄압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변화도 적지 않았다. 악명 높던 살인율이 뚝 떨어졌다. 2015년 세계 최고 수준인 인구 10만명당 106건에서 2022년에는 8건으로 92% 이상 감소한 것이다. 미국이나 멕시코로 망명하는 국민 수가 44% 줄었다.
부켈레는 여러 면에서 엘살바도르 정가의 이단아다. 팔레스타인계 이민자 출신 조부모를 둔 그는 광고회사를 운영한 뒤 2015년부터 4년간 수도 산살바도르 시장을 지내며 이름을 알렸다. 2019년 서른여덟 나이로 미니 정당 국민통합대연맹(GANA)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젊고 파격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앞세워 거대 양당 후보들을 누르고 깜짝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적 기반이 없어 임기 내내 기득권층에 휘둘릴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았다. 국제기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로 가상화폐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했다 가격 폭락으로 재정 위기를 겪는 등 위기도 찾아왔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으로 지지율은 날개를 달았다. 엘살바도르는 20세기 이후 여섯 번 쿠데타를 겪고, 1980년부터 12년간 좌우 진영의 유혈 내전을 겪었다. 오랜 정정 불안 역사에 만성적 치안 불안을 겪었던 국민에게 부켈레는 ‘거악(巨惡)과 싸우는 정의의 사도’로 각인됐다. 그가 소셜미디어 등에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독재자’ 등으로 소개하는 것도 높은 지지율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부켈레에 대한 열광적 지지는 ‘부켈리스모(Bukelismo·부켈레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이웃 국가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좌파·우파를 가리지 않고 각국 지도자와 유력 정치인들이 벤치마킹에 나섰다. 이런 흐름은 선거가 임박한 나라에서 두드러진다.
이달 말 대선을 앞둔 에콰도르에서는 부켈레에 대한 호감도(58%)가 이 나라 기예르모 라소 대통령(20~30%)을 압도했다. 그러자 주요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얀 토픽은 자신을 ‘에콰도르 부켈레’로 묘사하면서 턱수염과 가죽 재킷까지 입고 유세장에 나서고 있다.
역시 이달 말 대선 결선투표를 치르는 과테말라에서도 1차 투표 1위를 차지한 산드라 토레스 후보가 “엘살바도르를 모델로 부켈레식 정책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10월 지방선거를 앞둔 콜롬비아에서도 지난 5월 여론조사에서 55%가 ‘부켈레 같은 대통령을 원한다’고 답했고 67%가 ‘부켈레식의 대형 교도소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면 부켈레를 비판해온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의 지지도는 32%에 불과했다. 보수 야당 소속 마리아 페르난다 카발 상원의원은 부켈레 방식 지지를 선언했고, 수도 보고타 시장 후보 디에고 몰라노 전 국방장관은 초대형 교도소 건설을 공약했다.
온두라스에서는 현직 여성 대통령까지 ‘부켈레 따라 하기’에 나섰다. 시오마라 카스트로 대통령은 공식 행사에서 선글라스를 따라 쓴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공권력을 앞세운 범죄자 단속을 시작했고, 본토에서 200㎞ 떨어진 카리브해 스완 제도에 갱단 간부 2000명을 수용할 교도소 건설을 발표했다.
페루에서는 우파 진영 차기 대선 주자인 라파엘 로페스 알리아가 리마 시장이 “부켈레는 기적을 이루었다”며 범죄 단속을 약속했고, 디에고 우세다 리마 라몰리나 구청장은 부켈레 이름을 딴 공원 건설을 추진 중이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대선후보 산티아고 쿠네오가 선글라스를 착용하며 ‘아르헨티나 부켈레’를 자처하고 있다.
부켈레 신드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장은 “부켈레의 인기는 사회 안전 보장을 위해 유권자들이 인권, 시민의 자유, 법치 등에 대한 침해를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