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현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유정환 기자 2023. 8.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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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파워반도체가 꿈틀댄 것은 2020년 2월 경기 부천의 파워반도체 업체인 제엠제코가 둥지를 옮기겠다고 나서면서다. 부산시는 즉각 제엠제코와 본사·연구소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또 이듬해인 2021년 10월 제엠제코 본사와 연구소가 부산에 준공됐다. ‘부산 1호 반도체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 회사 최윤화 대표는 부천에 있는 파워반도체 기업에 부산 이전을 설득하는 한편 인재 양성을 위해 지역 대학과 계약학과를 개설하거나 상시 인력 채용에 나섰다. 거주지도 기장군 바닷가 인근 주택으로 옮겨 온전한 부산시민이 됐다.

반도체 불모지 부산에서 파워반도체 불씨를 피우려고 애쓴 그는 생소한 내용의 ‘파워반도체가 무엇인가’ ‘밸류체인은 어떻게 구축하는가’ 등을 소개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국제신문 ‘CEO 칼럼’에서 파워반도체 제조 환경 개선을 위해 쓴소리를 했다. 지난해 9월과 올해 3월 두 차례 차량 사고로 인한 정전으로 5개 기업에 6억 원에 이르는 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방치하면 파워반도체 산업의 활성화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최 대표는 “지금은 수억 원에 그쳤지만 앞으로 산단이 활성화되면 정전 한 번으로 수백억 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정전이 수시로 발생한다면 어떤 기업도 오지 않을 것”이라며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나 역시도 다음에 지을 공장은 다른 지역으로 옮길 것”이라고 선전포고했다.

기자가 동남권 의과학산단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방문한 동남권 의과학산단에서는 도로에 바짝 붙은 수십 기의 배전반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며칠간 추가 취재 끝에 게재한 기사 ‘교통사고 한 번에… 부산 파워반도체 공장 블랙아웃’(국제신문 지난 6월 15일 자 1면 보도)의 여파는 컸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움직인다’는 이성권 경제부시장이 기자에게 전화해 약 15분 동안 우려와 고민을 쏟아낸 것을 보면 가볍지 않은 사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이 부시장은 “국가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와 소부장 특화단지 선정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기사가 보도돼 걱정이다”고 했다. 이에 기자는 “특화단지 선정도 중요하지만 반도체산단에 정전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오히려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말이 먹혔던 걸까. 이 부시장은 불과 며칠 만에 한국전력공사 기장군 경찰 등 관계자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이 부시장은 “이번 사안은 전통 제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전환하는 부산의 산업구조 재편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라며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무조건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세를 가져 달라”고 강조했다.

이후 각 기관 실무진은 땡볕에 41기(총 62기 중 업체 내 설치 등 21기 제외)의 배전반에 대한 현장 전수조사를 해 25개 배전반을 옮기는 안을 검토하는 등 속도를 냈다. 이런 가운데 시는 지난달 20일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소부장 특화단지로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파워반도체 관련 대기업 등 산업 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도전한 국가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는 아쉽게 탈락했지만 말이다.

최종안 확정을 위한 책임자급의 의견 수렴이 다소 늦어지는 분위기다. 시 담당자는 “최종안 확정 전 입주업체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어 간담회 일정을 조율하느라 시일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일 뿐 손을 놓은 게 아니다”며 “최선의 안을 마련해 동남권 의과학산단을 반도체 업체가 일하기 가장 좋은 산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의지를 내비쳤다.


정부가 600조 원에 달하는 반도체 분야 투자를 수도권에 집중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산업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한 부산 탓도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된 산단을 조성하고 파워반도체 기업을 집적한다면 머지않아 국가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도 거머쥘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유정환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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