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등에 나체로 엎드린 그녀… 현실의 고통 잊기 위해 몽환 그렸다
[지금 이 명화] [10] 천경자 ‘초원 Ⅱ’
아프리카 초원은 어떤 모습일까? 하늘과 땅이 황토색을 이루고, 높이 솟은 나무가 드문드문 초록빛 신선함을 선사하며, 코끼리, 표범, 사자, 얼룩말이 평화로이 어슬렁거리는 곳일까?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초원이 이렇게 잘 구성된 색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천경자의 작품 ‘초원II’처럼 말이다. 다만, 천경자의 기억 속에 아프리카는 그렇게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1924년생 천경자. 그녀는 한국 근대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다. 특별히 롤모델도 없었고, 부잣집 출신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타고난 소질이 있었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운명적 절실함이 있었다. 아버지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고,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으며, 두 번째로 사랑한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네 자녀를 혼자 부양해야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림은 단순히 가족을 위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다. 화가 자신에게는 아예 ‘생존’ 도구였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온갖 현실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을 그림을 그림으로써만, 그러니까 그림 안의 환상 세계에 자신을 들여놓을 때에만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경자는 팍팍한 현실에서도 찰나의 행복감을 놓치지 않고 그림으로 박제했다. 더구나 그것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아름답게 가공했다. 현실과는 달리 그림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니까. ‘초원II’의 아프리카 풍경처럼, 그녀의 작품에 언제나 ‘연출’과 ‘연극성’이 들어있는 이유다.
‘초원II’는 화가가 아이들 아버지와 결별하기를 결심하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기 시작한 이후 제작한 작품이다. 그녀는 한국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미지의 원시 세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흡입해야만 했다. 1969년 남태평양을 시작으로, 1972년 베트남 참전, 1974년 아프리카 여행이 이어졌다. ‘초원II’는 1974년 아프리카 여행을 계기로 제작됐다. 킬리만자로 기슭에 있는 마사이 암보셀리 자연 공원에서 사는 맹수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녀는 “이 맹수 친구들 때문에 가벼운 여행 향수병에 걸렸다”고 쓴 적이 있다. 그림 속 천경자는 맹수들 틈에 끼어,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체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올라타 있다. 그림 속 화가는 고독해보이지만, 그녀는 황량한 초원의 “맹수 친구들”과 함께 이 고독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작품 보려면…]▲서울 소마미술관 8월 27일까지 ▲입장료: 성인 1만5000원, 학생 9000원 ▲문의: (02)724-6017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