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한반도, 우크라戰 탄약고

이철희 논설위원 2023. 8. 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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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조달처로 주목받는 70년 냉전지대
유럽 전장에서 남북 火力대결 다가온다
이철희 논설위원
얼마 전 외신들은 우크라이나군이 북한산 122mm 다연장로켓(방사포) 포탄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80, 90년대 생산된 이 포탄에는 한글로 ‘방-122’라고 찍혀 있었다. 전장의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우호적 국가’가 한 선박에서 압수해 넘겨준 것이라고만 했고, 우크라이나 국방부 측은 러시아로부터 포획한 것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잦은 오발·불발로 악명 높지만 병사들은 그나마 쏠 포탄이 있어서 다행으로 여긴다고 한다.

북한산 포탄 발견은 북-러 간 무기거래 의혹을 더욱 짙게 하는 새로운 정황이지만 결정적 증거로 삼기엔 부족하다. 지금 우크라이나군에는 옛 소련 시절 장비부터 최신 정밀유도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이런 다종다양한 탄약과 장비를 두고 ‘동물원(zoo)’ 같다고 할 정도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서방 진영은 각국이 보유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보냈다. 그런데 포탄이 제각각이다 보니 이탈리아 박격포에 핀란드 포탄을 사용하려면 꼬리날개를 일일이 갈아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나아가 미국과 영국은 소련식 무기로 무장한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할 탄약을 찾기 위해 옛 동구권과 유고연방, 아시아·아프리카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긁어모은 것들 가운데 30, 40년 된 북한 포탄이 끼어 있다고 해도 신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황이 흑해 연안으로 번지고 있지만 육상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다. 석 달째로 접어든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성과는 미미하다. 새로 편성된 우크라이나 기계화 부대는 지뢰밭과 대전차 함정, 콘크리트 장애물로 이뤄진 러시아군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다. 1차 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참호전·포격전 양상은 이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포탄 공급은 여전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냉전 종식 이후 방위산업을 대대적으로 축소한 각국이 갑자기 생산을 늘리기는 어렵다. 미국도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곳곳에서 병목 현상이 발목을 잡는다. 일례로 각종 무기에 사용되는 흑색화약 공장은 미국 내 한 곳만 남아 있었는데, 그조차 2년 전 폭발 사고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금지된 집속탄까지 지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포탄 고갈 사태에 주목받는 곳이 한국과 불가리아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이미 한국, 불가리아와 포탄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일본과도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살상무기 지원을 부인하지만 미국의 빈 탄약고를 채우거나 폴란드를 통해 우회 공급하는 등 우크라이나 탄약 지원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불가리아에선 소련식 포탄 생산을 위해 35년 전 폐쇄됐던 공장이 다시 문을 여는 등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사정은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지난달 말 북한 열병식에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참석시킨 데 이어 이달 초 고위급 인사가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VIP용 공군기를 평양에 보낸 것도 다급함의 방증일 것이다. 김정은은 쇼이구 장관을 직접 무기전시장으로 안내하는가 하면 최근엔 사흘 연속 군수공장을 시찰하며 저격소총 발사 시범까지 보였다. 김정은이 거론한 ‘국방경제사업’도 무기거래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힌다.

70년 넘게 냉전적 군사대결이 지속된 한반도가 새삼 신냉전 전장의 탄약고로 주목받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정당성이나 합법성 차원에서 남과 북은 전혀 다르다. 유엔 제재로 모든 무기거래가 금지된 북한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다. 하지만 보편가치도 국제법도 비웃는 광포한 전쟁의 시대다. 누가 먼저 들키는지 보자던 숨바꼭질도 이제 끝나가는 듯하다. 이후 닥칠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 면밀히 고민할 때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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