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비둘기와 누룽지[정기범의 본 아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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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한정식과 중식당, 고깃집을 운영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넓은 정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샴페인과 입맛을 돋우기 위한 가벼운 한입 음식을 먹고 나니 앞치마를 두른 주인장이 본식을 내오는데 비둘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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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살면서 미식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 것은 알랭 뒤카스, 기 사부아, 알랭 파사르, 피에르 가니에르, 야니크 알레노, 안소피 피크, 폴 보퀴즈와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과 만나 취재를 하면서부터다. 이들처럼 음식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킨 거장들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을 프랑스에서는 ‘가스트로노미 레스토랑’이라 부른다. 가스트로노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한 끼는 30만∼50만 원을 훌쩍 넘을 때가 많기에 푸아그라, 송로버섯, 캐비아 등 세계 3대 진미는 물론이고 최상의 식재료들이 나온다. 연말에 주로 등장하는 푸아그라는 거위의 입에 호스를 연결한 뒤 약 100g의 옥수수나 콩을 강제로 주입해 지방간을 만드는 방식 때문에 즐기지 않았고 그 외에도 몇 가지 기피하는 음식이 있다. 가령 소의 흉선 및 두개골 요리, 토끼, 그리고 비둘기가 그것이다. 이들을 대하면 이상하리만치 머리와 몸이 동시에 거부하는데 그래도 가스트로노미 레스토랑의 셰프들 나름의 노하우가 있을 테고, 최고의 재료로 만드니 먹어 봐야 한다는 생각에 2, 3회씩 도전해 봤지만 아쉽게도 아직 어렵다. 특히 프랑스에서 매년 800만 마리(무게로는 3500t)가 소비된다는 비둘기는 지중해 국가들이 즐겨 먹는 고급 요리이며 이집트에서는 결혼식 날 장모가 사위에게 만들어주는 귀한 몸이지만 거의 ‘레어’로 서비스됐던 물컹한 식감의 비둘기 살코기를 먹었던 첫 경험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얼마 전 프랑스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했을 때의 일이다. 아르메니아계였던 프랑스 변호사 부부의 초대였는데 음식과 와인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었다. 넓은 정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샴페인과 입맛을 돋우기 위한 가벼운 한입 음식을 먹고 나니 앞치마를 두른 주인장이 본식을 내오는데 비둘기구이다. ‘헉! 이럴 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불행히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둘기를 닭고기라 최면을 걸며 먹는 것이었다.
메추리만 한 크기에 바삭하게 구워진 표피를 벗겨내니 적당히 익은 가슴살은 먹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머릿속에 멧비둘기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예의상 와인과 함께 삼키듯 고기를 먹는 중에 주인이 버터를 넣어 만든 누룽지를 내온다. 누룽지와 버터가 어우러진 바삭하면서 또 기름진 누룽지는 우리 입맛에 잘 맞았고, 그렇게 5시간의 저녁 만찬이 끝났다. 자정이 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미처 먹지 못하고 오븐에 남아 있는 비둘기를 싸 가라며 주지 않을까 잠시 두려움이 생겼다. 다행히 남은 누룽지를 아이들에게 맛보게 해 주고 싶다며 선수를 친 후 대문을 나섰다. 집에 오는 길에 구슬프게 울어대는 비둘기 울음이 들리는 듯했고 그날 나는 다짐했다. 다음부터 누군가 식사에 초대한다면 비둘기에는 알레르기가 있다고 힘주어 말하리라. 토끼도, 쇠고기 흉선 요리도.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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