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태 악몽’ 예천 주민들, 태풍 북상 소식에 “잠이 안 온다”
지난달 폭우로 ‘쑥대밭’…실종자 2명은 아직도 못 찾아
어르신들 “대출 부담 이주도 못해…이번엔 피해 없길”
“90 넘은 노인이 (산사태 이후) 매일 비가 내리는 악몽을 꿔. 태풍까지 온다니 더 불안하지, 뭐.”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1리에 사는 김상기 할아버지(94)가 지난 8일 배수로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는 뙤약볕 아래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이곳은 지난달 15일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주민 2명이 실종된 곳이다. 당시 집중호우로 경북에서만 25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당시 김 할아버지의 집에도 집채만 한 바윗돌이 담벼락을 뚫고 마당까지 들이닥쳤다. 김 할아버지는 “나야 이제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냐”면서 “마을주민들이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산사태 직후 산에서 떨어져 내려온 바위와 나뭇더미가 쌓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마을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복구됐다. 흙더미에 파묻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집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돗자리 위에는 고추가 널려 있었고 마당 앞을 비질하는 주민도 보였다. 언뜻 일상을 찾은 것 같은 마을 풍경이었지만 주민들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제6호 태풍 ‘카눈’의 북상 소식 때문이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심리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윤혜식 할머니(82)는 아직도 밤마다 산사태가 일어나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산사태로 인한 급류에 휩쓸렸다가 이웃주민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윤 할머니는 “(산사태 후) 작은 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라면서 “낮잠 자다가도 산사태가 일어나는 꿈을 꾸는데 태풍까지 온다니까 더하다”고 말했다.
산에서 밀려 내려온 바위와 흙더미가 집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가 목숨을 건졌다는 70대 김모씨는 눈물을 훔쳤다. 산사태가 또 일어날까 봐 두렵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서다. 김씨는 “이주하면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준다지만 내 나이가 벌써 일흔이 넘었다”며 “무슨 능력으로 그 돈을 갚겠나. 산사태 난 곳 바로 옆에 있는 집이라 팔리지도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태풍 소식에 실종된 이웃에 대한 걱정도 컸다. 실종자가 영영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실종자 2명은 벌방리 주민으로 토사에 매몰됐거나 급류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된다.
집중호우로 5명이 목숨을 잃은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 주민들도 태풍 소식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주민 김정숙씨(72)는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태풍이 온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제발 큰 탈 없이 넘어가서 농작물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천군은 크고 작은 산사태가 일어난 마을 30곳과 대형 산불 발생지 등 산사태 우려 지역 370여곳을 사전 점검했다. 또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피 장소와 방법을 안내했다고 밝혔다.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남은 실종자 2명을 찾기 위한 노력도 26일째 이어지고 있다. 구조당국은 이날 인력 136명과 헬기 1대, 드론 10대, 중장비 6대 등 장비 68대를 투입해 수색에 나섰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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