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다르게 사는 상상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앞 조형물에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도서관을 지나갈 때면 이 조형물을 마주하게 되는데 모두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들어서려는데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온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책이 욕심이 많네!” 눈이 휘둥그레진다. 달려가 무슨 말인지 묻고 싶지만, 잠자코 기다린다. “어떤 날에는 친구랑 놀기도 하고 가족 여행을 갈 수도 있잖아. 그런 날에도 입안에 가시를 돋치게 한다니, 완전 욕심쟁이잖아.” 그 말을 듣고 엄마가 큰소리로 웃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사람의 처지가 아닌, 책의 입장에서 저 문장을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다름’이 생겼다.
괜한 심술이 나서 친구와 쓴소리를 주고받고 헤어진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저 문장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에 여유를 깃들게 하는 일이다. 이를 게을리하면 이유 없이 조바심이 나고 상대에게 허튼소리, 가시 돋친 소리를 하게 된다. 책 읽기는 궁극적으로 성찰하는 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깊이 살피지 않는 사람이 타인에게 친절할 가능성은 작다.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것은 아픔 때문에 견딜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돋친 가시를 어떻게든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한다는 얘기다. 말을 듣는 상대가 그 가시들을 다 받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가시가 돋치는 원인이 아닌 결과에 주목했기에 나올 수 있는 ‘다름’이다.
얼마 전, 영상을 통해 제주도에 있는 독립서점 <고요편지>를 알게 되었다. “서로의 고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는 표어처럼, 평온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서점을 방문하는 이들이 책을 읽으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영상에서 오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책장이었다. 책장에는 판매하는 새 책뿐 아니라 책방 안에서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헌책도 꽂혀 있었다. 책방에서는 헌책을 ‘반려책’이라고 불렀다. 반려동물, 반려식물처럼 책도 짝이나 동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동안 왜 하지 못했을까. 헌책이 반려책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책을 더 조심스럽게 꺼내 읽을 것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이름을 새로 붙이면 존재의 위상이 바뀐다는 걸 알았기에 ‘다름’은 생겨날 수 있었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다. 경기 고양시의 외곽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온통 논밭이었다. 시(市) 안에 숨겨진 보물섬 같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여기가 꽃밭’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정작 팻말 주변에는 꽃이 피어 있지 않았다. 꽃이 피었다 진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꽃이 없는데 왜 꽃밭이라고 하지? 나는 잠시 망연해졌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길가 군데군데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꽃밭이라고 명명해놓은 곳의 주변만 유독 깨끗했다. 그제야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고 경고하는 대신, 유머를 구사함으로써 ‘다름’의 진가가 발휘된 셈이다.
이런 ‘다름’들을 몸에 새기는 과정이 쌓이고 쌓이면 조금이나마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발 늦게 도착하더라도, 다름을 틀림으로 지적받더라도, 삶의 빈틈을 나만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여유가 있다면 입안에 가시가 돋칠 일도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아까 마주친 아이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아, 더워.” 엄마가 말한다. “덥지 않다고 생각하면 안 더워진다?” “나 방금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도 소용없던걸?” 아이가 삐죽 입술을 내민다. 불볕더위가 내려앉은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춥지 않네, 춥지 않아.” 겨울에 절실할 말을 미리 끌어다 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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