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눈떠보니 ‘의료 후진국’

기자 2023. 8. 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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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선진국 맞냐”라는 비판이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쏟아지고 있다. K팝, K드라마, K방역 같은 일부 영역에서의 성공 신화에 취한 정부가 평소 하던 대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 반에 공부 잘하는 학생 몇명 있다고 나도 덩달아 공부 잘하는 학생인 줄 착각에 빠져 공부 안 하고 시험을 망친 학생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그런데 새만금 잼버리 파행은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 진료 대란’ ‘원정 분만’ 같은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우리 의료체계의 붕괴 위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한때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부러워했다는 한국 의료체계가 붕괴하고 있는 배경에는 ‘한국은 의료선진국’이란 환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같은 객관적인 지표를 봐도, 언론에 연일 등장하는 의료 관련 기사를 봐도, 한국을 의료선진국이라고 하기 어렵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의료체계 성적표는 중하위권이다.

OECD 통계에서 의료체계 평가지표 12개 중 우리나라가 평균 이상인 것은 1개에 불과한 반면 평균 이하인 것이 4개로 훨씬 더 많다. 여러 선진국 의료체계를 비교하는 다른 평가에서도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중위권 성적에 머무르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처럼 동네 병·의원에서 전문의 진료를 쉽게 받을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하지만, 큰 병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려면 몇달을 기다려야 하고, 심장병·뇌졸중 같은 중증 응급환자의 전원율은 외국의 2~3배에 달한다. 암 진료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심장병 환자 사망률은 중하위권이고, 고혈압·당뇨병 진료나 정신과 진료의 성적표는 OECD 국가 중 꼴찌에서 순위를 세는 것이 빠르다.

지역 및 병원 간 의료 질 격차도 극심하다. 수도권과 대도시에 살면 큰 병이 나도 걱정이 없지만 지방이나 시골에서는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곳이 적지 않다. 경북 안동과 포항, 강원 춘천, 충북 청주, 전남 진료권의 중증환자 사망률은 서울에 비해 1.5배 높다.

우리나라는 병원 간 의료 질 격차도 외국에 비해 훨씬 크다. 우리나라는 대학병원급의 큰 종합병원 간 입원환자의 사망률도 4배가량 차이가 나지만 영국은 작은 병원들까지 포함해도 병원 간 사망률이 2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병원비도 싸지 않다. 우리 국민은 OECD 국가에 비해 병원비를 1.7배 더 많이 낸다. OECD 국가의 병원비 본인 부담률은 약 20%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는 35.5%로 더 높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료비도 2021년 OECD 평균 수준에 이르렀으니 이제 병원비 총액도 적지 않다. 암과 심장병 같은 중증질환의 병원비 부담이 OECD 평균 수준인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에서 의료보험 없이 응급실에 갔다가 병원비가 수억원 나왔다더라 같은 극단적인 사례와 비교해 우리나라 병원비가 싸다고 주장하는 것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다.

의료 질이 전반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병원비도 싸지 않고, 어디 사느냐에 따라 받는 의료 수준이 천차만별인데 어쩌다가 우리 국민은 한국이 의료선진국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한국 국민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국뽕’으로 시작된 얘기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이 의료선진국이라는 담론은 응급실 뺑뺑이 같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의료체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잠재우는 데 활용됐다. 공무원들은 ‘국민들이 한국을 의료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렇게까지 의료체계를 고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고, 의사와 병원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한국을 의료선진국으로 만든 자신들의 공로를 폄하한다고 했다.

한국은 예전에도 의료선진국이 아니었고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진료 대란, 원정 분만이라는 말이 일상화된 지금은 더더욱 아니다. 일부 대학병원의 의료 수준이 좋다고 해서, 동네 병·의원에서 쉽게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의료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한국이 의료선진국이라는 환상은 정부의 복지부동과 의사와 병원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돼 왔다. 그 결과 20여년 전에 시작됐어야 할 의료체계를 개혁해야 하는 과제가 미뤄졌다. 이로 인해 의료체계는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새만금 잼버리와 같은 파행을 맞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붕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의료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 시작은 한국이 의료선진국이란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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