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버스·지하철에 감동한 이유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유지민 | 서울 문정고 1학년
한국에선 휠체어를 타고 외출할 엄두를 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어려움이 상당 부분 ‘도시 디자인’에 있다는 걸 지난 7월 영국 런던을 다녀오면서 알게 됐다. 런던의 시내버스 대부분은 휠체어가 오를 수 있는 저상버스이고, 수백년 된 건물들도 이동약자를 위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런던의 진정한 장애 친화성은 ‘세심한 디자인’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휠체어 표시가 그려진 시내버스 승하차 버튼이다. 버스를 탈 때 외부에서 이 버튼을 누르면 경사로가 나온다. 내릴 때도 휠체어석 옆 버튼을 누르면 된다. 덕분에 한국에서와 달리 기사님을 향해 손 흔들거나 목청껏 외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버튼을 누르기 전에 휠체어에 탄 나를 발견한 기사님은 바로 경사로를 펼쳐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매번 버스를 타지 못하거나 원하는 데서 못 내릴까봐 전전긍긍했는데, 런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음으로 올해 개통 160주년을 맞은 런던 지하철은 시설이 낡아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역이 제한적인데, 대신 편의시설 안내 표지판 디자인은 이용자 편의에 맞춰 간명하게 통일돼 있었다. 가는 역마다 엘리베이터, 경사로, 장애인 화장실 등 편의시설 접근 방법을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이동약자 눈높이에 맞춰 글자 크기가 크고, 눈에 잘 띄는 색을 사용했다. 또 누리집(홈페이지)에서도 휠체어로 가기 편한 승강장 위치 정보를 제공했다. 평소 길치인 나는 한국 지하철에서 길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데, 런던에서는 이런 안내 덕분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세번째는 뜻밖에 한 대학 부설 작은 미술관에서 발견했다. 미술관 입구에는 학교 내부에 있는 장애인 편의시설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커다란 휠체어 접근성 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학교 내부 언덕과 경사로의 각도를 측정해 휠체어로 이동하기 편한 완만한 경로를 표시한 것이다. 휠체어용 길과 기존 길을 대체 가능한 우회로까지 나눠 표시한 세심함에 감탄했다. 이 지도를 보자마자 한국의 여러 대학교들이 떠올랐다. 이런 지도가 이들 대학교마다 있다면 이동에 제약이 있는 장애 학생들의 학습권이 한층 더 향상될 수 있을 텐데….
이런 디자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언뜻 생각난 건 나의 당연한 권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세심한 디자인은 이동약자의 이동 경험을 윤택하게 만들고, 이런 디자인을 비장애인도 쉽게 접할 수 있어 필요한 경우 도움을 청하기도 편해진다.
런던에서 장애인 지하철 접근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1999년이다. 이전에는 소방법 때문에 휠체어 이용자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런던시는 2006년 ‘장애 친화적 버스정류장 디자인 가이드’를 발표했다. 이 가이드에는 버스뿐 아니라 정류장까지 교통약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 기준이 제시돼 있었다. 이동약자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한 휠체어 전용 승하차 버튼도 여러해 전 도입됐다. 버튼을 눌렀는데도 수차례 승하차를 거부당한 휠체어 이용자가 영국 공영방송(ITV)을 통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일이 2016년에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날 런던의 장애 친화적 디자인은 이런 사건을 비롯해 이용자들의 수많은 피드백을 반영해 비로소 자리 잡게 된 셈이다.
한국에서 공공디자인,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디자인은 존재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동약자 관련 이용자의 피드백은 ‘불만’, ‘항의’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게 대부분인 듯하다. 이동권 향상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에게 ‘대중교통에 탈 수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말하는 분위기도 있는데, 이는 개선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태도다. 이런 속에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이용자 의견 경청에 바탕한 ‘당연한 권리를 보여주는 디자인’을 우리는 언제쯤 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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