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3김 때보다 정치 퇴행···선악 이분법 접고 문제 해결 능력 복원해야”
與野 상대 인정 않고 비방만, 대화타협 사라져 ‘동맥경화’
정치력 부재 巨野, 다수 의석 ‘힘’으로 착각 칼만 휘둘러 ?
정부·여당,‘과거 정권 탓’ 접고 설득·포용 리더십 보여야
총선서 선심 경쟁 우려···‘586세대’ 이후 비전 제시해야
한국 정치가 위기의 늪에 빠졌다. 여야 간의 대화와 타협은 찾아보기 어렵고 상호 비방과 무한 정쟁만 반복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장과 한국정당학회장을 지낸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야 모두 자신들 주장만 계속하면서 100% 얻어내려고만 한다”며 “지금 한국 정치는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동맥경화 상태”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정치 복원을 위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선악 이분법’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며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과 당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가 사라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지금 우리 정치 상황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보다 안 좋아졌다. 김대중 정부 말기만 해도 3김이 사라지고 나면 뭔가 더 나은 정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퇴행했다. 정치 구조 측면에서 보면 3김 시대에는 타협의 정치가 작동했다. 정치의 기본은 타협이다. 경제에 비유하면 기업들이 상대방 기업과 거래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쪽에서는 가장 비싼 가격에 팔려고 하고 다른 쪽은 최저 가격에 사려고 하지 않는가.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 실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야당과 여당 모두 각각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있을 것이다. 여야가 그것을 최대한 관철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정도에서 서로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정치의 고유 기능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기능이 사라졌다. 여야 모두 자신들 주장만 계속하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는 실종되고 배제와 독단, 증오와 독설만이 남았다. 지금 우리 정치는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해 동맥경화 증상을 보이고 있다.
-왜 이렇게 됐다고 보는가.
△정치적 자질과 경험이 부족한 인사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많이 나빠졌다고 본다. 3김 시대를 되돌아보자. 3김 모두 오랜 기간 정치를 했다. 특히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협과 합의를 중시했다. 한국의 민주화도 결국은 타협과 합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의 요구는 전두환 정권의 타도였고 전두환 정부의 목표는 민주화운동의 완전한 진압이었다.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마주쳤지만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상황이 풀렸다. ‘직선제를 받아들일 테니 새로운 게임의 정치로 가자’면서 두 세력이 공존하는 방식을 모색한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예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언제부터 정치의 기본이 사라졌는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진행된 ‘적폐 청산’ 작업이라고 본다. 적폐 청산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이뤄졌던 것들 대부분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 적폐 청산의 핵심은 이전의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과거를 악으로 규정하거나 과거 부정에 매달리면서 인적 처벌에 집중했다. 자신들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으로 치부하면서 정치를 ‘선악’으로 나눴다. 이로 인해 정치가 작동할 공간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극단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내려는 문제의식조차 없애버린 것이 지난 정부 적폐 청산의 나쁜 후유증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는 어떤가.
△윤석열 대통령은 여전히 정치 지도자보다는 검찰 관료 출신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만날 수 없다. 선악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결국 자기 지지층만 바라보게 된다. 지금은 일상적 수준의 합의나 타협의 정치가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통령에게 문제점을 스스럼없이 전달하고 막후 조절 능력을 갖춘 중간 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3김 시대에는 최형우·권노갑 같은 분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윤 대통령 곁에 이런 사람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돌파구를 열기가 쉽지 않다.
-그럼 정치 복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 대통령이 정책의 방향을 잡고 과감하게 집행하는 면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설득은 어떤 식으로 할지 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 야권의 반대를 풀어내기 위한 노력도 미흡한 듯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독단적 리더십 스타일을 지양하고 주변의 얘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주변에서 선뜻 나서기 어려운 만큼 대통령이 먼저 귀를 열 필요가 있다. 지금보다 더 정무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고 포용력도 넓혀야 한다. 특히 국민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야 한다.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는 지적이 많다.
△대통령제에서 국정 운영의 주체는 대통령과 여당이다. 야당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갖고 있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결국 야당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자신들의 주장이 잘 관철될 수 있도록 정치력을 발휘해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지금처럼 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합의를 이루는 데 굉장히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많은 의석을 ‘힘’이라고 착각해 국정을 주도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국민들에게 국정을 방해하고 발목을 잡는 것처럼 비칠 뿐이다. 책임 있는 국정 대안 세력이라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 의석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허공에서 칼만 휘두르고 있는 격이다. 현재의 민주당은 ‘의석 숫자는 많지만 허약한 야당’이라는 느낌을 준다.
-민주당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당 지도부의 정치력 부재라고 본다. 여기에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표방하는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대중의 민주당’ ‘노무현의 민주당’은 지향하는 가치가 있었다. 변화를 추구하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가치는 진보 진영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재명의 민주당’은 내세우는 가치가 명확하지 않다. ‘586세대 이후의 민주당 모습은 뭐지?’ ‘변화의 시대에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뭘 해야 하는 거죠?’라는 국민들의 물음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윤석열 정부의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는 것 이상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민주당의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당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려면 크게 바뀌어야 할 텐데.
△무엇보다 이 대표가 바뀌어야 한다. 수권 정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리면서 통 큰 정치를 해야 한다. 이 대표는 굉장히 제한된 범위에서 이른바 ‘우리 편 사람’만 골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최근 김은경 혁신위원장 논란의 주요 요인도 이 대표의 좁은 인재 풀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반대 목소리도 수용하고 포용해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당내의 언로가 막혀 있으니 ‘사당화’라는 지적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전(前) 정부 탓’만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집권 1년 동안에는 ‘전 정부 탓’이 어느 정도 명분이 될 수 있다. 이전 정부의 정책 잘못으로 국정 운영의 탄력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시점부터는 설득력이 약해지면서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 윤 대통령 당선의 주요인은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이제부터는 여당이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책임지고 끌고 나가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윤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보기 좋다. 하지만 구체적 성과가 나오려면 대통령 혼자 뛰어서는 안 된다. 관료 조직도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여당도 여론을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국민의 공감대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야의 내년 총선 전략과 판세 전망은.
△대통령 선거의 공약은 집행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약속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총선 공약은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진다. 특히 야당의 경우 실현 가능성이 낮아 ‘아무 말 대잔치’가 될 수 있다. 내년 4월 총선에서도 무책임한 포퓰리즘 공약, 상대방 비방이 난무할 공산이 크다. 여당은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 등을, 야당은 대통령 가족 관련 문제 등을 집중 공격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총선의 승패는 수도권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은데, 민주당이 지난 21대 총선처럼 많은 의석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누가 제1당을 차지할 것인가의 싸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큰 만큼 신당이 출현할 수 있다. 신당 출현이 현실화하면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세대교체 바람이 불 가능성도 있다. 단순히 ‘586세대 대체’라는 세대적 의미뿐 아니라 시대 가치적 측면에서도 우리 사회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세력이 등장할 때가 됐다.
◆He is···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마친 뒤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정당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한국 정치론’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대한민국 민주화 30년의 평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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