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98>삼성반도체통신, 국내 최초 대단위 VLSI 공장 건설

2023. 8. 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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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앞줄 왼쪽 세 번째)이 1984년 5월 17일 삼성 기흥공장 준공식에 채문식 국회의장과 금진호 상공부 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삼성전자 홍보실 제공

1984년 3월 31일.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은 이날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완공했다. 국내 최초이고 미국과 일본에 이은 세계 세 번째 첨단 반도체 공장이었다. 기흥공장에서는 64K D램 반도체를 월 600만개 생산할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12일 기공식을 한 지 6개월 만의 완공이었다. 당시로선 전무한 기록이었다. 1000억원을 들여 착공한 이 공장은 대지 33만㎡ 위에 연건평 2만8000㎡로, 1개월 시운전을 거쳐 5월부터 본격 제품 생산에 들어간다고 삼성반도체통신은 이날 밝혔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1983년 9월 기공식을 앞두고 성건평 공장장에게 지시했다.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끝내야 하네.”

이 회장의 지시는 지상명령이었다. 삼성그룹의 제2 도약 명운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휴일도 없이 전 임직원이 일심동체로 일한 결과 선전국에서 그동안 18개월 이상 걸리는 공사를 3분의 1인 6개월 만에 끝냈다. 기흥공장 준공은 국내 반도체 메카의 서막이었다.

성건평 전 삼성종합화학 사장의 회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짧은 기간 내 공사, 그러나 실현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처음에는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벽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추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성공의 열쇠는 정신적 공감대였다. 나는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며 그것도 6개월 안에 걸립해야 하는가'라는 벽보를 제작해 공장 내 이곳 저곳에 붙였다. 그리고 기흥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조처럼 외우게 했다. 나는 협력업체와 기기 납품업체에도 이란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관점을 바꿀 때 미래가 보인다)

기흥공장 기본설계는 일본 시미즈건설이 맡았다. 세부설계는 코리아엔지니어링과 삼우종합건설, 시공은 삼성종합건설과 중앙개발이 담당했다. 모든 공사는 2교대로 24시간 진행했다. 공사는 64K D램 생산공장과 사무동, 연구동 등 세 곳으로 나눠 추진했다. 공장장이 주재하는 건설 회의는 매일 0시 이후 심야에 열고 공사 진도를 확인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반도체 기초 과정을 끝낸 수습엔지니어들을 반도체 설비 발주업체로 파견했다. 그들은 반도체 업체에서 설비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 발주 장비와 함께 회사로 복귀했다. 이들은 장비 테스트나 응급 처치 요령을 따로 교육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장비 설치와 시운전, 정비 등에서 많은 시간을 단축했다.

6개월 공사를 위해 새롭게 도입한 혁신전략은 동기화(同期化)였다. 모든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건설공사 공정은 릴레이 달리기와 같았다. 한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기존 관행을 깨고 마라톤 하듯 모든 공정을 동시에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 대신 필요한 자금과 인력 등은 최우선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200여개 장비 제작 공정과 운송, 도착, 설치에 이르기까지 일정을 기록하는 대형 상황판을 설치했다. 이를 보고 조금이라는 계획보다 늦어지는 사업장이 있으면 즉시 사람을 보내 문제를 해결했다.

이병철 회장은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28층 회장실에서 일일 회의를 주재하면서 공사 상황을 꼼꼼히 확인했다. 이 회장은 수시로 예고없이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성건평 공장장 등 현장 임직원들은 긴장감으로 하루도 발 뻗고 편히 쉬지 못했다.

반도체 공정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 작업이 바로 노광 공정이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노광기는 미국에서 비행기로 도입했다. 이 기기는 광학기계와 절밀기계장치로 구성, 진동에 매우 예민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사전에 모의 운반시험을 했다.

성건평 전 삼성종합화학 사장의 증언. “트럭에 노광기와 같은 무게의 짐을 싣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진동을 측정한 결과 시속 40㎞ 이상은 무리라는 점을 확인했다. 그래서 실제 장비를 운반할 때는 기술자가 직접 김포공항부터 지휘 감독을 하면서 시속 30㎞로 운반하기로 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IC에서 회사까지 4㎞ 구간이 비포장도로였다. 트럭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도로였다. 도로 상태가 나빠 어쩌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 김포공항을 출발한 운송 차량은 우회도로를 택해 시속 30㎞ 미만의 속도로 운행했다. 운전기사에게는 '가능한 한 천천히 운전하라'고 당부했다. 오후 5시. 기흥공장 진입로에 도달한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좁은 자갈밭이던 공장 진입로 4㎞가 2차로 도로로 포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 인부와 회사 전 사원들이 힘을 합쳐 몇 시간 만에 도로 확장과 포장 공사를 모두 끝낸 것이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해 5월 17일. 삼성반도체통신은 이날 오후 경기 용인군 기흥면 능서리 현장에서 VLSI 전용공장 준공식을 거행했다. 준공식에는 채문식 국회의장, 금진호 상공부 장관,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 김성진 체신부 장관 등 정·관계 인사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부회장,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재계 인사 등 1500여명이 참석했다.

이병철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부존자원이 없어 경제개발에 불리한 여건이지만 우수한 두뇌와 강인한 국민성, 높은 교육열이 있어서 컴퓨터나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기술이 가장 적합하다”면서 “삼성은 오늘 준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해서 내년에 256K D램을 개발해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좁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이날 “오는 1990년까지 투자 규모를 대폭 늘리고 공장도 66만㎡ 부지에 22만㎡로 증설해서 64K D램, 256K D램, 1M D램, 마이크로 프로세스 등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단위 반도체 공장과 컴퓨터 및 관련 부품공장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또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수입에 의존해 온 64K D램과 256K D램을 국내에서 생산, 1987년까지 총 15억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금진호 상공부 장관은 이날 공장 건설에 공이 큰 성건평 공장장과 김성환 이사, 이윤우 이사 등 18명을 표창했다.

이병철 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 “이 건설의 총지휘자는 성건평 공장장이었다. 선진국 관례로는 18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는데 이를 3분의 1로 단축했다. 건설공정과 시운전을 지켜본 미국 인텔과 IBM, 일본 유수 업체 관계자나 전문가들도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불철주야 스케줄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열성을 다한 작업 인원은 연 26만명에 달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은 공휴일 출근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호암자전)

준공식 2개월 후인 7월 삼성반도체통신은 기흥공장 제2 라인 정지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8월 15일 공사에 착수, 이듬해인 1985년 3월 말 준공했다. 제2 라인 완공까지 1900여억원의 자금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삼상반도체통신은 '수도권정비계획법'이란 최대 난관에 부닥쳤다. 정부가 마구잡이개발을 막기 위해 기흥단지 내 신규 건설이나 개발을 제한한 것이다.

제2 라인을 제때 건설하지 못하면 256K D램을 개발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다.

유귀훈 씨가 쓴 '호암의 마지막 꿈'에서 밝힌 내용. “유일한 해법은 용도변경이었다. 이를 위해 강진구 사장과 홍종만 이사, 이정우 이사, 박신용 부장, 회장 비서실 이형도 이사, 반도체사업부의 김현곤 이사 등이 이 일에 모두 매달렸다. 삼성그룹의 흥망이 달린 일이었다. 풀어야 할 매듭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건설부와 상공부, 과학기술처, 경제기획원 등 정부 부처가 거의 연결돼 있었다. 반도체는 정부가 국가전략산업으로 적극 육성키로 한 산업이었다.”

이 문제는 청와대 경제팀이 나서서 해법을 찾았다. 경제팀은 반도체와 컴퓨터의 두 업종에 한해 예외를 인정하자는 내용의 '수도권정비계획과 삼성반도체 공장부지 문제'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청와대는 각 부처 협의를 거처 부총리와 국무총리 서명을 받았다.

1985년 3월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 재가해 기흥공장 제2 라인 건설을 허용했다. 2개월 후 기흥 제2 라인은 준공검사에 통과했다. 위기의 터널을 벗어난 삼성반도체통신은 256K D램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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