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엄태화 감독 “‘살아있는 순간’ 포착하려고 ‘리허설 컷’도 사용”[인터뷰]
스탭 아닌 감독으로서 만난 이병헌 감개무량
“박찬욱, 한계 없이 새로운 걸 도전하는 스승”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텐트폴(Tentpole, 대작 영화) 시장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경험이에요. 영화 성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이렇게 수많은 배우들과 작업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겐 굉장히 큰 공부입니다.”
엄태화 감독은 지난 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연출에 대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 감독이 ‘가려진 시간’(2016년)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자 세 번째 장편 영화다. 이 가운데 텐트폴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에 앞서 단편 영화계에서 탄탄한 내공을 쌓아왔다.
9일 개봉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의 생존 이야기로,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는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의 출입을 원천 봉쇄하고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생존하는 과정을 그린다. 자기 밖에 모르는 극한 이기주의부터 남을 챙기는 이상적인 이타주의까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원작의 소재가 아파트인 점을 주목했다. 그는 아파트가 한국에선 단순히 거주지를 넘어 ‘한국 사회를 집약하는 상징물’이라고 봤다.
“아파트는 제가 자란 곳이기도 하고, 한국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배경이라는 점에서 끌렸어요. 제가 잘 아는 공간이다 보니까 잘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컸고, 관객들이 그만큼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엄 감독의 작품은 주로 ‘이면’에 집중한다. 영화 ‘잉투기’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겉모습과 현실의 간극을, ‘가려진 시간’은 흥미진진해 보이던 판타지 세계의 다른 면을 조명했다. 이번 작품 역시 이러한 관점이 엿보인다.
그는 “인물이나 현상을 볼 때 이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며 “영화에서 아파트는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유일한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 이병헌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 이병헌이 주연했던 영화 ‘쓰리, 몬스터’ 촬영 당시 엄 감독은 연출부 스탭이었다. 이번엔 감독과 배우로 만났다. 그에게 이번 작업은 감개무량한 순간이기도 했다.
“예전에 파주 세트장에서 병헌 선배와 ‘쓰리, 몬스터’를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작품의 첫 장면도 파주 세트장에서 촬영했어요. 굉장히 감개무량했어요. ‘쓰리, 몬스터’ 때 그 세트장에서 병헌 선배가 피를 토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제가 붐마이크를 잘못 들고 있는 바람에 24번 테이크 만에 끝낼 수 있었던 촬영을 31번 테이크까지 갔어요. 정말 식은땀이 흘렀던 순간이었죠. 병헌 선배도 그때를 기억하더라고요.”
엄 감독의 연출 방식은 독특하다. 연습 차원에서 하는 리허설 촬영본을 실제 편집에 자주 사용한다. 리허설 촬영도 그에겐 리허설이 아닌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아파트 잔치에서 이병헌이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장면은 리허설 컷이다. 이병헌도 엄 감독의 이러한 연출 방식에 대해 ‘예상치 못한 기발함’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리허설할 때 배우들이 ‘연습이다’ 생각하고 여유롭게 하는 편인데 그럴 때 진짜 같은 ‘살아 있는 순간’이 있어요. 덕분에 영화에 테스트 컷들을 꽤 많이 썼어요. ‘슛 가겠습니다’와 리허설을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배우들에게 깐깐하게 연기 방향을 요구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해석과 연기를 믿고 맡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허술하진 않다. 의견 조율을 할 땐 오히려 섬세한 편이다. 30여 명이 모여서 큰 합을 맞춰야 하는 반상회 장면 촬영 땐 리허설 촬영을 마친 뒤 모든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주고 받았을 정도다.
영화에선 그의 친동생인 배우 엄태구도 깜짝 출연한다. 짧은 등장이지만 존재감이 매우 강한 캐릭터다. 엄 감독 역시 이번 영화에서 동생의 등장이 ‘꽤 존재감 있었다’고 평가했다.
엄 감독은 “출연은 짧지만 등장하는 순간 존재감이 느껴지고 그의 말에 귀 기울 수 있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태구의 목소리가 한몫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출연을 제안했고, 다행히 존재감을 잘 드러냈다”고 말했다.
엄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키즈로 불린다. ‘친절한 금자씨’(2005), ‘파란만장’(2011) 등 박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연출팀 막내부터 조연출까지 맡으며 경력을 쌓았다. 그에게 박 감독은 스승이나 다름 없다. 이번 후반 작업 때도 박 감독에게 편집본을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박 감독님은 시대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걸 생각해내세요. 성실하게 자신의 한계를 두지 않고 작업하시는 모습이 제가 따라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박 감독님이 길을 닦아 놓으신 덕분에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믿음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엄 감독은 여러 시나리오를 두고 차기작을 고심하는 가운데 언젠간 공포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공포 영화를 쉽게 즐기며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저는 공포 영화를 못 봐요.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게 뭔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엄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다. 재미와 생각. 영화 내내 높은 몰입도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면 그는 ‘목표 달성’이라고 했다.
“영화에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부분에 몰입하느냐에 따라 엔딩이 다르게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역지사지(易地思之,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의 질문을 가지고 나가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아요. 부디 재밌게 몰입해서 봤으면 좋겠습니다.”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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