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 굴리는 실리콘밸리 신기술 감별사 “기술 너머 진짜 가치 파고든 게 성공 노하우”
31조원 굴리는 실리콘밸리 최대VC
수익 중요하지만 리스크 분산도 중점
초기·후기 단계 투자비중은 50대50
세일즈포스·웹엑스·로빈후드 등 투자
'기술의 가치' 가려낸 게 성공 노하우
생성형AI도 엄청난 가능성 창출할 것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활용 면에서 진짜 가치를 줄 수 있으려면 정교한 데이터셋이 필요한데 나날이 데이터셋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성품 AI’를 쓰다가도 저마다의 기술과 데이터셋으로 맞춤형으로 발전하면 생성형 AI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먼로파크 샌드힐로드 2855번지. 간판조차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2층짜리 건물이지만 40년간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스타트업들이 ‘넥스트 구글’ ‘넥스트 테슬라’를 꿈꾸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곳이다. 이곳에는 지난달 기준 총투자운용금액(AUM)이 240억 달러(약 31조원)에 달하는 실리콘밸리 최대 벤처캐피털(VC)인 NEA(New Enterprise Associate)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VC 업계의 전체 AUM 규모가 갓 50조 원을 넘어선 것을 고려하면 VC 한 곳이 우리나라 전체 VC 업계의 60%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하는 수준이다. 실리콘밸리의 앤드리슨호로위츠·세쿼이아캐피털과 함께 3대 VC로 꼽히는 NEA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의 시초라 할 세일즈포스에 초기 투자했고 화상회의 솔루션으로 시스코에 32억 달러에 인수된 웹엑스도 일찍이 가능성을 알아보며 신기술 감별사로 명성을 굳혔다. 이 외에 미국 최대 증권 앱 로빈후드(2015년), 클라우드 보안 플랫폼 클라우드플레어(2010년), 소셜커머스 그루폰(2008년) 등에도 투자했다. 스콧 샌델 NEA 최고경영자(CEO)는 국내 언론사 중 처음으로 서울경제신문과 창간 인터뷰를 하면서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주는 가치를 가려낸 것이 성공의 노하우”라며 “강력한 가치를 줄 때 소비자들이 반응하는데 생성형 AI는 소비자 측면에서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샌델 CEO는 ‘강력한 가치 제안(strong value proposition)’이라는 말을 16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는 앞선 대단한 기술인데도 이용자들에게 강력한 가치를 주지 못하는 것이 많다”며 “생산성을 10% 높이는 소프트웨어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10배·100배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는 제품을 본다”고 강조했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가능성을 ‘무한한 상승세(unbounded upside)’로 간주하고 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그의 일이다.
기업을 볼 때 기술 너머의 본질을 파고든 데는 평생의 결핍이 큰 동력이 됐다. 샌델 CEO는 다트머스대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첫 직장인 마이크로소프트(MS)에 입사해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PC 운영체제 윈도95의 프로덕트매니저를 맡았다. 이후 1996년 NEA에서 VC심사역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VC들이 일하는 방식으로는 차별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학습 장애의 하나인 난독증(읽기 장애)을 심하게 겪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샌델 CEO는 “포기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읽어서 공부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 배우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며 “사업 모델 요약(executive summary)과 창업자들의 이력 단 두 가지만 팠다”고 전했다.
‘당신이 이 비즈니스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가 그의 첫 번째 단골 질문이었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기존의 삶을 버리고 창업에 뛰어든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고 그곳에 해결할 문제와 기회 요인이 존재했다. 그는 ‘어떻게 제품이나 기술로 문제를 풀 것인가’에 이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샌델 CEO는 “이 질문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이용자들이 이 제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할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창업자들이 그 사업에 얼마나 리스크를 베팅할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본이 투입되는지는 그다음 문제라는 설명이다. 이후 2016년 CEO에 취임해 16~18VGE펀드를 연달아 출범시켰고 전체 AUM 규모를 80% 가까이 키웠다.
실리콘밸리는 올해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스타트업 생태계가 크게 위축되는 경험을 했다. 이를 두고 샌델 CEO는 “실리콘밸리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주제가 ‘최대한 빨리 성장하라’에서 ‘가지고 있는 돈의 한도에서 효과적으로 성장하라’로 바뀌었다”고 짚었다. 그는 “이전에는 수익 없이 성장하는 것으로 창업자들이 페널티를 받지 않았지만 금리 인상과 벤처펀딩 위축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출혈 경쟁의 대표 주자였던 우버가 2분기 2009년 창업 이후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활황일 때는 기업가치가 인플레이션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 생태계가 위축되는 딜레마 간의 균형을 묻자 적정한 기업가치를 가진 성장주를 찾아낸다는 의미의 ‘GARP(Growth at a Reasonable Price) 전략’을 언급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무한한 상승세’를 보이는 기업인 경우 당시의 기업가치 평가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3~5배 성장이 아닌 50배·10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뤄줄 그런 기업이다. 하지만 동시에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율은 철저히 50대50으로 가져간다. 그는 “리스크가 큰 초기 단계에 50%를 투자하지만 이들 중 후기 시리즈까지 투자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오직 5~10%가량의 기업만 후기 단계까지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성장 잠재력이 높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과 기업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유독 활기찬 성장 동력을 느낀다. 뛰어난 테크 분야 인재들이 많고 이제 인력들이 실리콘밸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넘어 널리 퍼져 있다”며 “사업을 서울에서 시작하든 싱가포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든 빅테크로 키워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한국인 직원도 채용해 아시아 시장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고 있고 한국투자공사(KIC) 등 국내 기관과도 협업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샌델 CEO는 “특히 한국의 경우 삼성 같은 대기업과 우수한 인력, 좋은 학교 등이 혁신적인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며 혁신 생태계 구축에 좋은 요소를 갖춘 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madein@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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