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착한 바이러스의 사악한 전략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3. 8. 9. 11: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지요법을 중심으로 파지 연구의 역사와 전망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는 책 ‘착한 바이러스’가 최근 출간됐다. 교보문고 제공

7월 하순 장마가 끝나고 시작된 무더위의 기세가 대단하다. 이러다 보니 되도록 외부 활동을 피하고 남는 시간은 집이나 동네 카페에서 책을 보며 지내고 있다. 아무래도 독서의 계절은 여름인 것 같다. 최근 읽은 책 가운데 두 권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먼저 캐럴 계숙 윤의 ‘Naming Nature(자연에 이름 붙이기)’로 분류학의 역사를 소개한 책이다. 재작년 연말 출간됐음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인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뒤늦게 읽다가 이 책의 제목에 영감을 준 책이라기에 궁금해 읽어봤는데 평소 분류학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다만 2009년 출간됐음에도 여전히 한글판이 없다는 게 아쉽다.

다음은 최근 출간된 톰 아일랜드의 ‘The Good Virus(착한 바이러스)’로 박테리아(세균)를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이하 파지) 이야기로 이를 치료에 이용하는 파지요법의 역사와 전망을 주로 다루고 있다. 콜레라 같은 세균성 질환을 이들을 숙주로 삼는 파지를 투여해 죽여 치료하는 방식이다. 파지가 바이오항생제인 셈이다.
 

인도 갠지스강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종교의식으로 목욕을 해왔고 오염이 심한 지금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수인성 전염병 창궐이 생각보다 드문 건 파지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 갠지스강 미스터리의 배후

한 10년 전 파지요법에 대해 알게 돼 글감으로 써먹은 적도 있지만 내심 이해가 안 가는 면이 있었다. 이렇게 명료하면서도 간단한 치료법이 왜 여전히 널리 쓰이지 않고 있는가(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파지요법을 받을 곳이 없다)라는 근본적인 의문인데 책을 읽으며 이유를 알았다. 아울러 그동안 역시 이해가 안 가는 현상의 배후에도 파지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많은 인도인이 종교의식으로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는데 강물이 너무 더러워 보여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할 것 같다. 실제 콜레라가 퍼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수질에서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드문데 연구에 따르면 바로 파지 때문이다. 갠지스강에는 박테리아도 많지만 이를 숙주로 삼는 파지도 많아 강물이 체내에 들어와도 파지와 인체 면역계가 편을 먹어 박테리아가 힘을 못 쓴다는 것이다.

한편 골치 아픈 세균성 질환이 저절로 낫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파지로 설명할 수 있다. 박테리아와 파지는 서로 진화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인체에 감염한 상태에서 파지가 변이를 일으켜 병원체인 박테리아에 치명타를 가하면 자가 치유가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있어 파지 등쌀에 근근이 살아가던 박테리아에 변이가 생겨 파지의 공격에서 벗어나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심각한 질환으로 바뀔 수도 있다.

1917년 파지를 발견하고 박테리오파지란 이름을 지은 프랑스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 1919년 파지요법을 최초로 성공시켜 감염병 치료의 역사를 썼지만, 동료들의 미움을 사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 이질로 사경 헤매던 소년 구해

파지 발견 과정은 항생제 페니실린 발견 과정과 꽤 비슷하다. 1915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프레데릭 트워트는 홍역 바이러스를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만 증식할 수 있다는 기본 지식은 물론 그 실체도 몰랐던 시절이다(1930년대 바이러스를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 발명됐다). 실험은 당연히 실패의 연속이었고 때때로 오염이 일어나 배지에 박테리아나 곰팡이가 자랐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오염으로 자란 포도상구균에서 특이한 현상을 관찰했다. 고체 배지의 특정 영역에서 구균이 자라지 못했다. 이 부분을 채취해 다른 배지에 섞자 거기서도 구균이 자라지 못했다. 이는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의도적으로 키운) 포도상구균 배지에 푸른곰팡이가 오염돼 자라자 주변 포도상구균이 죽는 현상을 보고 항생제 페니실린을 발견한 과정과 비슷하다.

다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페니실린은 희석하면 효과를 잃지만 트워트가 발견한 물질은 희석해도 효과가 여전했다. 따라서 트워트는 단순한 화합물, 분자가 아니라 ‘별도의 생물 형태’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용균물질’이라는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까지 알려진 가장 작은 생명체인 박테리아도 걸러지는 필터를 통과하는 작은 크기 때문이다.

같은 해 프랑스 파리 파스퇴르연구소의 괴짜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은 군대에 퍼진 이질 역학 조사에 참여해 수거한 시료(설사)에서 이질균을 검출했고 백신 개발을 진행하던 중 과거 멕시코에서 메뚜기떼를 박테리아로 박멸한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 박테리아를 배양하다 역시 트워트와 비슷한 현상을 관찰했던 데렐은 설사 시료에 이질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물질이 들어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하고 필터로 거른 용액을 투입해 그런 현상을 확인했다. 

반복 희석 실험을 통해 효과가 여전하다는 걸 확인한 데렐은 가족회의를 열어 박테리아를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에게 박테리아와 ‘먹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파게인을 합친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리고 1919년 심한 이질로 사경을 헤매던 소년에게 정제한 파지 용액 2밀리리터를 투여해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파지요법 시대를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전쟁사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큰 피해를 냈다. 6개월이 넘는 공방 끝에 소련이 이기는 데는 파지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소련은 콜레라로 죽은 병사의 시료에서 파지를 찾아 증식시켜 병사들에게 보급해 콜레라 발생을 독일군에 비해 크게 낮출 수 있었다.위키피디아 제공

● 구소련에서 명맥 이어

데렐은 겸손함과 담을 싼 사람으로 자신의 발견에 우쭐해 당시 파스퇴르연구소의 저명한 면역학자들을 무시했고 그 결과 왕따를 자초했다. 그가 무려 28번이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도 결국 받지 못한 배경이다. 

한편 조지아(그루지아)의 미생물학자 조지 엘리아바는 1918년부터 3년 동안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머물며 데렐의 파지연구를 지켜봤고 1926년 다시 찾아 제대로 공부한 뒤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가 수도 트빌리시의 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44년 페니실린 대량 생산이 성공하며 항생제 시대가 열리자 서구권에서 파지요법이 자취를 감춘 반면 서구 과학 성과를 애써 무시한 소련은 파지요법에 계속 매달렸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구소련의 몇몇 나라에서 파지요법이 쓰이고 있다.

특히 엘리아바가 터를 닦은 조지아가 발달해 있어 매년 세계에서 불치의 세균성 질환을 앓고 있는 많은 환자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조지아를 찾고 있다. 책에서는 이런 사례 몇 건이 소개돼 있는데 꽤 극적이다. 

예를 들어 등산하다 추락 사고로 발목뼈가 부러진 한 캐나다인은 항생제내성 세균이 뼈까지 침투해 염증이 심해져 절단이 불가피하다는 의료진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수년간 독한 항생제로 버텼다. 그러나 상황이 나빠져 더 버티기 힘든 지경에서 파지요법을 알게 돼 조지아로 건너가 치료를 받고 극적으로 회복했다는 식이다.

● 까다로운 신약 승인 체계가 걸림돌

항생제내성 병원균이 점점 늘어남에도 효과적인 대안인 파지요법이 여전히 널리 쓰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기존 대형 제약회사들의 외면으로 파지요법은 본질적으로 맞춤형 치료이기 때문이다. 감염 부위에서 분리한 박테리아에 맞는 파지를 찾아 치료제로 써야 하므로 번거롭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 상징되는 서구의 신약 승인 시스템도 파지요법 확산의 걸림돌이다. 임상시험 등 각종 조건이 너무 까다롭고 비용도 엄청나 개별 파지요법마다 승인을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그러다 보니 2050년 항생제내성 병원균으로 지구촌에서 매년 1000만 명이 사망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음에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책의 5부 ‘미래 파지’에서 파지요법의 앞날을 밝게 그리고 있다. 병원균 게놈을 분석해 수많은 파지 시료를 모아놓은 파지은행에서 딱 맞는 파지를 골라 공급하는 시스템이나 인공적으로 파지를 합성하는 시스템 개발 현황을 소개하고 있고 개별 파지요법이 아니라 파지요법 시스템 자체로 FDA 승인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기업도 있다.

한편 아프리카 각국 현지인들에게 파지요법을 가르쳐 오늘날 조지아처럼 토착 세균성 질환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서구에서 새로운 항생제나 백신을 개발할 날만을 무력하게 기다릴 게 아니라 세균성 전염병이 발생하면 병원균을 분석해 맞는 파지를 찾아 치료제로 만드는 소규모 공장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들 나라는 서구의 까다롭고 복잡한 신약 개발 시스템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허술함이 오히려 장점인 셈이다.

대장균 세포의 단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위층이 세포 바깥쪽의 세포벽이고 아래층이 세포 안쪽의 세포막이다. 세포막에 박혀있는 단백질인 MraY(녹색)는 세포벽의 성분을 만드는 효소로 파이X174의 단백질E(노란색)가 달라붙으면 활성을 잃는다. 이때 단백질E는 대장균의 샤프론 단백질인 SlyD(보라색)에도 붙어 복합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그 결과 세포벽 구성성분을 제대로 못 만들어 세포벽이 점차 약해지다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 세포가 터지고 내부의 파지가 흩어지는 용균 과정이 일어난다. 사이언스 제공

● 파지 용균 메커니즘 규명

책을 읽다가 얼마 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파지 연구가 떠올랐다. 대장균을 숙주로 삼는 파지의 하나인 Φ(파이)X174의 용균 메커니즘을 분자 차원에서 밝힌 결과다. ΦX174는 역시 대장균을 숙주로 삼는 T4와 함께 파지계의 유명인사다. T4가 아폴로 우주선을 닮은 전자현미경 이미지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파지라면 ΦX174는 게놈이 작아 분자생물학 초기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영국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는 자신이 개발한 DNA 염기서열 분석법으로 1977년 첫 게놈을 해독했는데 불과 염기 5386개로 이뤄진 ΦX174로 유전자는 11개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하나의 산물인 단백질E가 용균 과정에 관여한다. 

ΦX174 입자는 대장균 세포 표면을 인식해 달라붙은 뒤 내부로 게놈을 주입한다. 대장균의 전사 및 번역 시스템을 탈취해 증식한 파지는 단물이 다 빨린 박테리아를 터뜨리고 나와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때 관여하는 게 단백질E로, 대장균 세포벽의 구성성분을 만드는 효소인 MraY의 활성을 억제한다. 그 결과 세포벽이 약해지면서 내부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세포가 터지는 것이다. 그러나 단백질E가 정확히 어떻게 MraY 효소 활성을 억제하는가는 모르는 상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의 화학자들은 극저온전자현미경으로 단백질E의 일부가 MraY에 달라붙어 반응물질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차지하는 동시에 단백질E의 나머지 부분이 또 다른 대장균 단백질인 SlyD에 달라붙는 복합체를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원래 SlyD는 대장균의 다른 단백질이 제대로 접히고 안정된 구조를 유지하게 도와주는 샤프론 단백질인데, 여기서는 엉뚱하게 단백질E가 MraY에 달라붙은 채 오래 갈 수 있게 보호자 역할을 한 셈이다.

단백질E는 아미노산 91개로 이뤄진 작은 단백질로 유전자 길이도 276개에 불과해 용균 능력이 없는 다른 파지의 게놈에 끼워 넣어 용균 능력을 갖게 만든다면 파지요법의 범위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자들은 전망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포도 작물화가 독립적으로 두 차례 일어났다는 게놈 분석 결과를 담은 논문에서 한 곳이 조지아다(코카서스). 한편 2000년대 초 보존이 잘 된 호모 에렉투스 두개골이 발견된 이후 고인류학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드마니스도 조지아의 지역이다. 이들 과학을 테마로 조지아 여행 일정을 짜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