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상, 또 하나의 전쟁[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가을에 사과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끌 것 같네!’
‘크리스마스 전에 끝나 집으로 가게 되기를 희망해’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6·25 전쟁 휴전회담에 유엔군 측 5명의 대표 중 아레이 버크 극동해군 부참모장(준장)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회담 타결 전망에 비관적이 되어갔다.
협상은 버크의 우려보다 훨씬 길어져 2년도 넘긴 759일간 계속됐다. 협상 시작 후 양측 사망자는 개전 이후 1년과 비교해 3배가량 많았다. 희생을 줄이자는 휴전 협상이 더욱 피를 부르는 역설을 낳았다. (이용호, 107쪽)
● ‘싸워서 승패 가릴 수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며 압록강에 도달할 때까지는 휴전이나 협상을 생각지 않았다. 중공군도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로 서울을 다시 점령할 때까지 남진(南進)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1951년 4, 5월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뒤 37도 선까지 내려왔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 올라갔다. 4월 이후 두 차례 춘계 공세를 퍼부으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중동부 전선은 점점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유엔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다시 38선을 치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11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해임은 확전론을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다. 만주 폭격이나 핵무기 사용 등 ‘확전’은 소련 참전을 불러올 수 있고 3차 대전으로 비화할 우려가 크다고 워싱턴은 판단했다. 유럽 방위에 대한 부담, 38선 돌파 북진 시 20만 명 이상의 추가적인 미군의 인명 손실 우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여론의 피로감 등도 휴전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1951년 2월 이후 양측 모두 군사적 승리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하려는 목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김계동, 272쪽)
1952년 5월 리지웨이에 이어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는 “공산 측은 최후 공세가 봉쇄되자 재빨리 휴전 회담을 제의해 유엔군의 역공세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휴전 회담에 응했다”고 분석했다.(클라크, 163쪽)
● 순조롭지 않은 협상 첫 출발
“소련 인민은 한반도의 무력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계 토의가 교전국 간에 시작되어 38선에서 군대가 서로 철수할 수 있도록 휴전과 정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야콥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부 대사가 1951년 6월 23일 저녁 유엔의 라디오방송 시리즈 기획 ‘평화의 대가’에서 던진 한마디는 공산권의 첫 공식 휴전 의사 표명이었다.
1주일 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공산 측은 하루 만에 “개성에서 7월 10~15일 회담하자”고 응답했다. 7월 10일 개성의 99칸 한옥 집 내봉장(來鳳莊)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그런데 공산 측은 시작부터 기싸움과 선전전에 몰두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터너 조이 제독 일행이 헬기에서 내리자 미군에게서 노획한 지프차와 군용트럭에 백색기를 달아 일행을 태운 뒤 회담 장소로 갔다. 회담 장소도 유엔 측이 제시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거부하고 중공 측이 통제하는 개성으로 오게 한 것처럼 유엔군이 정전 협정이 필요해 항복하듯 찾아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회담장 주변에 배치된 공산 측 병사들은 유엔 측 일행을 포위하고 자동소총을 위협적으로 흔들어대기도 했다. 협상 테이블 위의 공산 측 깃발을 유엔 측보다 더 큰 것으로 가져다 놓는가 하면 동양 문화에서 ‘승자가 남쪽을 향해 앉는다’며 북쪽 편에 공산 측 자리를 배치했다.(이용호, 108쪽)
회담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조이 제독은 깜짝 놀랐다. 의자 다리가 짧아 마주 앉은 상대측 대표 남일 앞에서 마치 ‘어뢰를 맞고 침몰하는 해군 제독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의자를 바꿔 앉기 전 공산 측 사진기자들의 촬영은 이미 끝난 뒤였다. 공산 측은 회담 사흘째 유엔 측 기자단 출입을 막으려다 리지웨이 사령관이 “유엔 대표단도 회담장으로 가지 말라”며 강경 대응해 공산 측은 물러섰다.(조이, 11쪽)
유엔군 측 |
공산군 측 |
수석대표 터너 조이 극동해군사령관 |
수석대표 북한 인민군 참모총장 남일 |
미 8군 부참모장 헨리 하지스 소장 |
중공군 제1부사령관 덩화(鄧華) |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그 소장 |
중공군참모장 셰팡(謝方) |
극동해군 부참모장 아레이 버크 준장 |
북한 인민군정찰국장 이상조 |
백선엽 1군단장 |
북한 인민군 제1군단 참모장 장평산 |
● ‘외국군 철수’ 주장, 미 반대로 철회
워싱턴의 휴전 협상 지침은 ‘회담은 군사행동 중지를 위한 정전회담으로 국한해 중공의 유엔 및 안보리 가입이나 지위 문제, 대만 문제, 38선 문제, 군대 철수 등은 배제하라’는 것이었다.
앞서 중공이 2차 대공세(11월 25일∼12월 10일)로 기세를 올리던 1950년 12월 7일 저우언라인(周恩來) 총리가 휴전 조건 5개 항을 제시하는 것 같은 상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우 총리는 외국 군대 한반도 철수, 미군 대만해협과 대만 철수, 중공의 유엔 진입과 장제스(蔣介石) 축출 등을 내세웠다. 마치 승전국이 내미는 카드와 비슷했다.(선즈화, 618쪽)
예상대로 공산 측은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즉각적인 정전, 38선 중심으로 20km 비무장지대 설치, 모든 포로 교환과 함께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포함했다. 중소는 국경만 넘으면 군대를 다시 투입할 수 있지만 (태평양을 건너간) 미군은 돌아오기 어렵다. 미국은 외국 군대 철수는 공산 측에 침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의 강한 반발로 ‘외국 군대 철수’는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 시작 16일 만에 합의된 의제는 ① 비무장지대 설치 및 군사분계선 설정 ②정전 감시기관 설치 등 정전 휴전 실천 위한 조치 ③포로에 관한 조치 등이었다.
● 군사분계선 기준 실랑이, 접촉선 v. 38선
공산 측은 군사분계선을 전쟁 전의 38선으로 하고 20km의 비무장지대를 둘 것을 제의했다. 옹진반도 등 서부 전선 일부를 제외하고는 38선 이북으로 진출한 아군을 철수시키고 방어할 수 없는 선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상 항복에 다름없다고 여겼다. 조이 대표는 “전쟁에서 잃은 것을 회담에서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미군은 현 전선에서 북쪽으로 20마일(32km) 넓이를 비무장지대로 하자며 평양 원산선 근처까지 표시된 지도를 들이밀며 맞섰다.(리지웨이, 281쪽)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회담장 주변 중공군 무장병력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다 항의하면서 며칠을 허비했다. 공산 측은 미 공군기가 회담장 인근 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하며 2개월가량 회담을 중단됐다가 10월 31일 재개됐다.
회담이 멈춘 사이 미군은 7월 30일과 8월 14일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전선을 16km가량 북진시켰다. 그러자 공산 측은 ‘38선 분계선’ 주장을 철회했다. 11월 27일 양측은 지상군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로 38선 이남의 개성과 옹진반도는 북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 최대 난제 포로교환, 자유 송환 v 강제 송환
짧으면 한두 달 내로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이 2년을 끌게 된 가장 큰 변수는 ‘반공(反共) 포로’의 처리 또는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협상 초기 2만 명의 중공 포로 중 1만5천명이 송환을 거부하는 등 공산 측 포로 중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거나 이전 장제스(蔣介石) 부대 소속으로 북한에 연고가 없어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유엔 측은 인도적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한 자발적 송환이 되어야 한다고 한 반면 공산 측은 모든 포로를 자동으로 강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귀환 거부는 냉전체제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환영할 일이었다.
공산 측이 강제 송환을 고집한 것은 포로 미귀환으로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것과 함께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 전선에서 투항자를 막으려는 계산도 있었다. 공산 측이 완고하게 버티자 유엔 측은 1952년 10월 회담을 중단해 6개월 후인 이듬해 4월에야 재개됐다.
● ‘협상 유도용 무력행사’
클라크 사령관은 ‘회담은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공산 측과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이를 돌파하는 것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클라크는 자신이 ‘동양 최대의 심장’이라고 표현한 수풍댐 등 압록강의 5개 발전소에 대해 1952년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맹폭을 가해 북한이 2주간 정전됐다. 트루먼은 “휴전 협상에서 협력적인 태도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의 공격”이라고 했다.
7월 11일에는 작전명 ‘프레셔 펌프’로 평양을 향해 1254회 출격해 1500개의 건물을 파괴했다. 8월 4일과 29일에도 평양의 군사 목표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됐는데 29일 하루에만 1403회 출격해 700t의 폭탄이 투하됐다.(김계동, 333쪽)
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루한 공방을 벌이던 포로 협상은 공산 측이 자유 송환과 5개국 중립국 위원회를 통한 심사 및 귀환을 받아들이면서 타결됐다. 클라크의 표현처럼 ‘총포’가 큰 작용을 했다. 초반 협상을 맡았던 리지웨이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은 가혹한 세금처럼 인내심을 시험해 성서 속 인물인 욥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리지웨이, 86쪽)
유엔군 포로 |
공산군 포로 |
||
휴전시 송환 |
1만 3444명 |
휴전시 송환 |
8만 2493명(부상병 포함) |
송환 거부 |
2만 2604명 |
||
반공포로 석방 |
2만 7000명 |
||
송환거부 |
359명 (한국군 325명, 미군 21명, 영국군 1명 등) |
민간인 귀환자 |
3만 7000명 |
합 |
1만 3803명 |
합 |
16만 9097명 |
● ‘포로에게 포로가 되다’
6·25 전쟁 포로 문제는 ‘반공 포로’의 송환을 두고 휴전 협상에서 큰 걸림돌이 됐을 뿐만 아니라 수용소 관리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례를 보기 드문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공산 측은 공작대원들을 포로로 가장해 수용소 내로 잠입시키거나 친공 포로들을 전투요원으로 이용하는 ‘제6열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 측의 지령에 따라 판문점 휴전 협상과 연계한 활동을 벌였다. 포로들을 분산 수용하려고 하자 거제 76수용소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지하도를 파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전투 계획서까지 발견됐다. 수용소 측은 공산 공작대원과 포로들 간의 간첩 연락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던 수용소 주변의 민간인 부락을 철거시키기도 했다.
1952년 5월 거제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도 이런 분위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포로에게 포로가 되는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클라크, 87쪽) 포로들은 프란시스 도드 포로수용소장(준장)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3일 후 풀어주었다. 이들은 석방 조건으로 수용소 자치화, 자유 결사 허용, 수용소 막사 간 연락 전화 가설 등을 요구하고 반공포로 심사 중단을 요구했다.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을 계기로 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에 내란에 버금가는 8개월간에 걸친 피 묻은 투쟁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수용소 내 시위 폭동 반란 탈옥 반공포로 탄압 등이 적절히 관리되지 못한 데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데다 관리를 위해 배치한 인력이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리지웨이는 진단했다.(리지웨이, 286쪽)
정전협상 중 더욱 치열했던 혈전들
● 피로 물들인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들
강원도 양구 방산면에서 국군 5사단이 북한군 12사단과 벌인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6일~22일)는 미군 부대가 실패한 작전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고지쟁탈전이었다. 공격 목표로 삼은 T,U,V 등의 주요 고지를 연결한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해 ‘단장의 능선전투’(9월 13일~10월 15일)는 양구 방산면과 동면 일대에서 미 제2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벌인 접전으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은 종군기자들이 붙여준 표현이다. 아군은 한 달여 전투 끝에 능선을 추가 점령해 전선을 북쪽으로 올렸다. 아군은 3700여명이 전사한 반면 공산군 피해는 2만1000여명에 달했다.(온창일, 257쪽)
양구전쟁기념관에는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벌어졌던 도솔산, 피의 능선, 펀치볼, 단장의 능선 등 9개 전투가 9개 기둥에 새겨져 있다. 전적비의 숲이 고지전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 ‘작전명 쥐잡이’ 지리산 공비토벌
1951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된 뒤 38선 주변에서 대치와 고지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후방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무장공비도 골칫거리였다. 군은 당시 이상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 약 3800명이 지리산 일대에 출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백선엽, 2009, 264쪽) 주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 작전을 개시한 뒤 북으로 가는 퇴로가 막힌 북한군 정규군이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과 여순 사건에 가담한 좌익 무장 세력 등이었다.
공비토벌은 휴전협상 초기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가 전방 1군단장으로 옮긴 백선엽 소장이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라는 특수 임무를 띤 부대를 조직해 맡게 됐다. 수도사단과 8사단 등이 투입된 백사령부는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지리산을 포위해 좁혀가는 ‘토끼몰이’ 방식으로 소탕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사살 5800여명, 포로 5700여명이었다. 일부 잔당은 휴전 후까지 출몰했으나 공비토벌은 일단락됐다.
● ‘삼용사’가 실마리 푼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 3개 사단으로 구성된 38군은 1952년 10월 6일 강원도 철원의 ‘395고지’ 공격을 시작한다. 국군 부대는 전쟁 기간 승패와 영욕을 겪은 김종오 사단장의 9사단. 15일까지 육탄전을 벌이며 24회나 뺏고 뺏기는 대혈전이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1만5천명이 사망했고 국군도 3천4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투의 실마리는 ‘백마고지 3용사’가 풀었다. 전투 시작 1주일째인 10월 12일 제30연대 제1대대는 백마고지 9부 능선에 설치된 적 기관총 화력에 피해만 입고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포병이나 공군 화력으로도 제압되지 않았다. 이때 3중대 1소대장 강봉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적진지에 뛰어들어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자신들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마고지는 이후 다시는 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서울 능동어린이공원에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이 있다.
무명의 봉우리 ‘395고지’가 백마고지로 불린 유래는 명확지 않다. 작전 기간 중 포격에 의하여 산 정상의 수림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뒤 나타난 산의 형태가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종군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 아래로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지세를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온창일, 279쪽)
● 상감령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오성산과 인접한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m의 무명능선이다.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중공군 제26군이 이 능선에서 미 제25사단을 저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중공군에게는 오성산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 관문이었고, 국군 제2사단에는 사단 주저항선을 감시하는 위협요소를 없애고 오성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고지였다.
양측이 방어 전면 약 800m를 두고 6주가량 전투를 벌였다. 미 7사단은 인근의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으로 부른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한 달 이상 전투 결과 중공군 전사자가 3배 이상이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 최후의 혈전, 금성고지와 베티고지 전투
강원도 화천 북방에서의 금성샛별고지 전투(1953년 7월 13~19일)는 정전 협정 1주일 전에 끝났다. 국군 제2군단이 초기에 금성 돌출부를 상실했지만, 중공군 5개군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쳐 금성을 회복하고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1주일가량의 전투에서 국군은 1만 4373명(전사 부상 실종 포함),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4km가량 전선을 밀어 올리는 대가치고는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렀다.
정전협정 직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틀간 벌인 베티고지 전투(7월 15〜16일)는 국군 제1사단의 1개 소대가 중공군 3개 대대 병력과 싸워 고지를 끝까지 사수한 기적 같은 전투였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적은 314명이 사살된 반면 아군 전사자는 6명에 그쳤다. 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한국과 미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는 임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뺏기면 휴전선이 10km 이상 남쪽으로 밀려 임진강 남쪽으로 그어질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15일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 반까지 19차례에 걸쳐 아군 교통호까지 밀고 들어와 총검과 육박전을 벌였다. 베티고지 전투는 영화 ‘격퇴’(1956)와 ‘베티고지의 영웅들’(1980)의 소재가 됐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베티고지가 임진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태풍전망대에서는 매년 호국영령 추도식이 열린다.
참고 문헌 |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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