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손·음성만으로 조작하는 ‘공간 컴퓨터’

박원익 더밀크코리아 뉴욕플래닛장 2023. 8. 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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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의 유익한 IT] 애플 야심작 ‘비전 프로’, VR·AR 판 뒤엎는다

● 스마트폰 다음 혁신은 다중현실(MR)
● R1칩으로 디지털 콘텐츠 사실감↑
● 홍채 인식 보안 시스템 ‘옵틱ID(Optic ID)’
● 메타 ‘퀘스트3’보다 7배 비싼 가격은 걸림돌
● 몸과 컴퓨터 직관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미래

애플이 공개한 애플 비전 프로의 모습. [Apple]
"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But we do have one more thing)!"

6월 5일(현지 시간) 애플의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WWDC 2023' 현장. 기조연설을 진행하던 팀 쿡 애플 CEO의 목소리가 떨렸다.

1999년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신제품을 소개하며 애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문장이지만, 여느 때와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애플이 2014년 '애플 워치' 이후 9년 만에 새로운 개인용 컴퓨팅 기기를 발표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팀 쿡 CEO는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나갔다.

"오늘은 제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날입니다. 저는 증강현실(AR)이 심오한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현실 세계와 결합하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혁신적인 신제품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AR 플랫폼을 발표하게 돼 기쁩니다. 애플 비전 프로(Apple Vision Pro)를 소개합니다."

6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플파크에서 열린 ‘WWDC 2023’에서 팀 쿡 애플 CEO가 애플 비전 프로를 소개하고 있다. [Apple]

애플이 선택한 단어는 '비전'

애플은 이날 업계의 예상대로 새로운 MR(Mixed Reality·혼합현실) 헤드셋을 발표했다. 기기 이름은 소문으로 돌았던 '애플 리얼리티 프로'가 아닌 '애플 비전 프로'로 밝혀졌다. 애플 측은 애플 비전 프로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첫 번째 '공간 컴퓨터(spatial computer)'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발표인 만큼 애플은 이날 두 시간가량 진행된 기조연설의 후반 40여 분을 애플 비전 프로와 이 기기에 적용된 새로운 운영체제 '비전OS(visionOS)'에 집중적으로 할애했다.

팀 쿡 CEO는 "오늘은 컴퓨팅 방식에 있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라며 "Mac이 개인 컴퓨터,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애플 비전 프로는 우리에게 공간 컴퓨팅을 소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팀 쿡 CEO와 애플은 의도적으로 MR, VR(Virtual Reality), AR(Augmented Reality), XR(eXtended Reality·확장현실) 같은 기존 업계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공간 컴퓨팅'과 '비전' 두 단어를 강조했다. 애플이 만든 MR 헤드셋은 다른 제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는 게 애플의 주장이다.

손에 들고 사용하는 조작 도구인 핸드 컨트롤러 없이 눈과 맨손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어도 밖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점, 외부에서도 헤드셋 착용자의 눈을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공간 컴퓨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R1칩·고해상도 디스플레이로 차별화

애플 비전 프로의 가장 큰 특징은 직관적 입력 체계인 사용자의 눈과 손, 음성으로 제어 가능한 거의 완벽한 3D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선보인다는 점이다.

헤드셋을 착용한 사용자가 바라보는 디지털 콘텐츠가 마치 실제 공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제공하기 위해 헤드셋 내부 2개의 디스플레이(양쪽 눈앞에 위치) 마이크로 OLED 기술을 사용, 도합 2300만 픽셀을 밀집시켰다.

강력한 성능을 뒷받침하기 위해 듀얼 칩을 적용한 부분도 눈에 띈다. 애플은 발열 문제를 막기 위해 자체 개발한 고성능 M2칩을 애플 비전 프로에 탑재했다. 맥북과 아이패드에 주로 사용되는 고성능 CPU다. 이외에도 12개의 카메라, 5개의 센서, 6개의 마이크가 있다. 각 센서와 카메라, 마이크에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는 장치도 갖췄다. 또한 R1칩을 사용해 디지털 콘텐츠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R1 칩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8배 빠른 12밀리초(msec) 안에 새로운 이미지를 화면에 띄울 수 있다. 전원을 연결하고 하루 종일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고성능 외장 배터리를 사용할 경우 최장 2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다.

곡선형 폼팩터(Form factor·물리적 외형)도 애플 비전 프로의 특징이다. 3D입체 조형된 단일 부품 코팅 글래스가 탑재됐다. 이는 카메라와 센서 모음을 위한 하나의 외부 렌즈 역할을 한다. 코팅 글래스는 특수 제작된 알루미늄 합금 프레임으로 매끄럽게 연결되며 사용자의 얼굴을 곡면으로 감싸는 폼팩터를 완성하게 된다.

편리한 착용감을 위해 유연한 스트랩을 적용했다. 음향 장비가 사용자 귀 근처에 위치하도록 설계됐다. 헤드셋을 지지하는 밴드 역시 탄력이 있는 단일 부품으로 통기성과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홍채 인식으로 보안 강화

애플 기기답게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및 보안 기능을 제공하는 것도 특징이다. 아이폰에 '페이스ID'를 도입해 특정 사용자만 잠금을 해제할 수 있도록 했다면 애플 비전 프로는 홍채 인식 기술을 활용한다. 애플이 새롭게 도입한 보안 인증 시스템 '옵틱ID(Optic ID)'가 그 주인공이다.

옵틱ID는 다양한 비가시(非可視) LED 광선에 노출된 사용자의 홍채를 분석한 후 애플의 보안 전용 프로세서 '시큐어 인클레이브(Secure Enclave)'에 보호되고 있는 등록된 옵틱ID 데이터와 비교해 잠금을 해제하는 방식이다.

홍채 인식 등 생체인식 기술은 해킹 위험에 더 유의해야 한다. 비밀번호와 달리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안이 중요한 기술이다. 애플은 이 같은 문제를 암호화와 공유 제한으로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애플 측 발표에 따르면 사용자의 홍채 정보는 개별 기기에 내장된 칩에 암호화를 거쳐 저장된다. 해당 내역은 온라인상에 공유되지 않는다. 제삼자는 물론 애플도 접근할 수 없다. 클라우드 서버 등 외부로 데이터가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게 애플 측 설명이다.

애플 비전 프로를 착용한 사용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대한 정보 역시 보호된다. 시선 추적 정보는 애플과 서드파티(외부 협력업체) 앱 또는 웹사이트와 공유되지 않는다는 게 애플 측 주장이다.

시선 정보에 대한 우려가 나온 것은 MR 경쟁사인 메타 때문이다. 메타는 광고 매출 의존도가 높은 회사다. 업계에서는 메타가 MR 하드웨어 시장을 장악한다면 사용자 시선이 향하는 곳의 정보를 모아 타깃 광고를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애플 비전 프로는 이런 우려에 대해 "비전 프로의 시선 정보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셈이다.

사용자가 주변 사람들과 연결된 느낌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색다른 기능인 '아이사이트(EyeSight)' 역시 안전 기능과 관련이 있다. 아이사이트는 비전 프로를 착용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기기 렌즈 부분이 투명하게 바뀌며 사용자의 눈이 보이고, 사용자 역시 주변 사람을 볼 수 있는 기능이다. 헤드셋 착용 시 다른 이와 부딪치는 등의 안전사고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애플 비전 프로의 가격은 3499달러(약 460만 원)로 책정됐다. 내년 초 미국 내 애플 스토어와 애플닷컴에서 판매한다. 미국 이외 국가의 경우 내년 중 발매할 예정으로 구체적 시기는 공개하지 않았다.

디즈니와 협업으로 MR 활용 생태계 조성

거대한 도전과 기회를 향한 첫발을 뗐지만, 향후 애플이 넘어야 난관은 산적해 있다. 우선 현재 VR, AR, MR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인 메타가 가장 큰 경쟁자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2022년에 판매된 880만 대의 VR 헤드셋 중 메타의 퀘스트2, 퀘스트 프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80%에 달한다. 메타는 애플을 의식, WWDC 4일 전인 6월 1일 499달러(약 65만 원)에 최신 헤드셋 '퀘스트3'를 발표했다. 비전 프로의 성능, 사용자 경험이 뛰어나다고 해도 가격 차이가 7배에 달하기 때문에 애플이 시장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퀘스트3’를 깜짝 공개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 인스타그램]
애플 역시 이런 상황을 인지, 다양한 카드를 준비한 것으로 풀이된다. 팀 쿡 CEO는 이날 밥 아이거 디즈니 CEO를 무대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디즈니와 애플의 협업 사실을 알렸다. 예컨대 애플의 비전 프로 헤드셋을 착용한 채 디즈니 플러스의 인기 TV 시리즈인 '만달로리안'을 시청하면 사용자의 주변 환경을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외계 행성 '타투인'으로 설정한 채 영상을 즐길 수 있다.

NBA 경기를 시청하면서 득점 상황을 3D 가상현실(CourtView)로 게임처럼 다시 재생해 즐기는 것도 가능해진다. 내 집 거실에 디즈니월드 놀이 기구를 3D 증강현실로 재현하는 장면도 이날 기조연설에서 시연됐다.

게임 이용자들은 생생한 몰입형 환경을 경험할 수 있다. 애플 비전 프로에 탑재된 3D 카메라를 통해 소중한 순간을 몰입형 비디오, 오디오로 저장할 수 있다. 비전 프로를 착용한 채 애플의 화상통화 기능인 페이스타임을 활용하면 재택근무 시 동료와 같은 공간에서 토론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애플 비전 프로를 사용하는 모습. [Apple]
아이폰 개발자들이 제공하는 앱을 탐색할 수 있고, 수십만 개의 기존 아이폰, 아이패드 앱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애플이 이미 확보한 13억 명의 아이폰 사용자와 생태계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애플의 기존 개발자 커뮤니티는 비전OS를 활용, 새로운 앱 경험을 설계할 수 있다. 다만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 사용자 확보가 쉽지 않은 만큼 초기에는 전문가용 디자인, 협업 도구가 비전 프로용 앱의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메타버스 미래는 감각의 확장

업계 전문가들은 애플이 그리는 메타버스, MR의 미래가 '공간 확장'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에 있다고 분석한다.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강조한 '고객 경험(Costomer Experience) 우선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전략이라는 평가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에서 출발해 시장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고객·사용자가 원하는 경험에서 출발, 이를 구현할 기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줄기차게 강조해 왔다.

애플의 하드웨어 개발 철학인 '내추럴 유저 인터페이스(Natural User Interface)'가 대표적이다. 인간이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것처럼 기기의 이용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의미다. 애플은 아이폰에서 이 철학을 선보였다. 자판 대신에 손가락을 사용하는 터치스크린을 도입했다. 당시 아이폰의 대항마로 꼽히던 블랙베리는 자판을 고도화한 쿼티 키보드를 휴대폰에 탑재했다. 자판과 손가락의 대결은 후자의 압승으로 끝났다.

AR 헤드셋 스타트업 '미라(Mira)'를 인수한 것도 내추럴 유저 인터페이스를 추구하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미라 프리즘 프로'를 사용하면 스마트폰을 들지 않은 채 손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눈앞에 필요한 정보를 띄울 수 있다. 헤드셋 착용자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지 않고, 주변 환경 확인도 가능하다. AR 스타트업 시어스랩의 최형욱 CSO(Chef Stratage Officer·최고전략책임자)는 "애플은 비전 프로를 통해 우리 몸이 컴퓨터와 직관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박원익 더밀크코리아 뉴욕플래닛장 wonick@themil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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