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망령처럼 소환되는 학폭의 기억
신간 '학교폭력, 그 이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내가 만나본 가해 학생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고, 가정과 학교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들도 있었으며 모범생이라 불리는 전교 회장, 심지어 수능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국내 1호 학교폭력 전문변호사인 노윤호 씨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학폭 가해자는 사소한 신체적 특징이나 말투 등 여러 이유로 트집을 잡는다. '나보다 좋은 성적' '이성 친구에 인기가 많아서' 등 질투가 이유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학교폭력이 들통이 난 후에도 '피해자 때문에 학교 폭력이 발생한 것'이라고 핑계를 대며 '피해자 너는 잘못이 없냐'고 되묻는다.
노 변호사에 따르면 가해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피해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가해자들이 학교 폭력을 장난, 놀이라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런 가해자의 '놀이' 탓에 오랜 시간 지옥 속에 내던져진 듯한 고통을 겪는다.
A양이 학교가 정말 싫어진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동급생 중 2명은 A양을 상대로 폭행과 골탕 먹이기, 금품갈취를 일삼았다. 2학기 때 용기를 내 담임 교사에게 그 사실을 말했지만, 그 2명은 '그런 적이 없다'며 발뺌했고, 담임 교사는 가해자의 말을 믿고 사건을 대충 무마했다. 어른에게 말해봤자 해결되는 일이 없자 A양은 입을 닫았다. 그러나 3학년 때 괴롭혔던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면서 A양의 비극은 다시 시작됐다.
노윤호 변호사가 쓴 '학교폭력, 그 이후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사연 중 하나다. 책은 학교 폭력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더불어 학교 폭력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조명한다.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피해자는 학교 폭력을 깔끔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상당수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학업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들처럼,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우울증, 공황장애를 비롯해 각종 육체적·정신적 질환에 시달린다.
한국학교정신건강의학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신과 전문의 62.7%는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 우울, 공황장애, 광장 공포증, 대인관계에서의 위축, 자존감 하락 등을 겪는다고 답했다.
심한 경우에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진다. 만 19세 이상 27세 미만 성인 1천3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아동기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초기 성인기 심리 정서적 어려움 및 자살에 미치는 영향'(박애리·김유나) 논문에 따르면 학교 폭력을 겪은 성인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성인보다 2.6배 높았다. 학교 폭력을 경험한 성인의 54.4%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고, 13%는 극단적 선택을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노 변호사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길을 가다 우연히 가해자를 마주치거나 SNS에서 그의 모습을 보면 학교 폭력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가해자는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복수심이 든다고 한다.
B양도 그랬다. 그는 학교 폭력을 당한 후 11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청소년기에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었고, 사회 활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제약이 생겨 오랫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해자 중 한 명이 지역 병원에 근무하며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 SNS를 통해 그의 과거를 폭로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도덕적 가치관과 맞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불쾌함과 죄책감이 들어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학폭 피해자 상당수는 이렇게 오랜 기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에는 수치심 때문에, 그다음에는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서, 그리고 보호자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탓에, 피해자는 학교 폭력을 신고하길 꺼린다.
그런 마음의 장벽을 깨고 용기를 내 신고한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제 곧 반이 바뀌지 않냐'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 등 교사들의 무심한 반응이 뒤따르기 일쑤고, 이는 피해자를 더 큰 궁지로 몰아넣곤 한다.
이렇게 더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학교 폭력을 경험하면 신고부터 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설사 부정을 바로잡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어서다.
학교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하는데, 신고를 통해 구현되는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에게 힘을 부여해 양자 간 불균형을 바로잡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 불균형을 잡는 방법은 단순하다. 가해자, 주변 학생들, 교사, 그리고 경찰과 교육청 등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이다.
노 변호사는 "학교폭력 트라우마는 신고 후의 결과가 아니라, 학교폭력을 알리고 공적인 절차를 밟으면서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고 가해자로부터 사과와 반성을 끌어내며 피해자의 가족들이 피해자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치유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치유는 "그 상처를 똑바로 직면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와공감. 208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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