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봄날은 언제? LG의 준우승 잔혹사
변함없는 역사는 또 있다. 무관. 번번이 정상 문턱을 넘지 못한 LG는 여전히 대구 한국가스공사, 수원 KT와 함께 챔피언결정전 우승 경험이 없는 세 팀 가운데 한 팀으로 남아있다.
1997-1998시즌에 청주 SK(현 서울 SK)와 함께 신생팀으로 KBL에 뛰어든 LG 농구단의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럭키금성그룹 시절이었던 1994년 6월 농구단 창단 계획을 발표했고, 럭키금성은 프로농구 출범 시 여기에도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그룹명이 LG로 바뀌며 ‘LG반도체 농구단’으로 첫 걸음을 뗀 LG는 대우, 동양과 함께 1996년 농구단을 정식 창단하려 했으나 계획을 1년 미뤘다.
LG는 “최고의 농구단이 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라는 다부진 포부와 함께 탄탄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130억 원을 들여 제일은행으로부터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전용체육관을 인수한 데 이어 양희승, 박규현, 박재헌 등 고려대 출신이 중심을 이루는 창단멤버 구성도 마쳤다. 1996년에는 대만프로농구팀 홍궈 감독을 맡고 있던 슈퍼스타 이충희를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현재는 SK가 KBL의 신흥 강호로 부상했지만, 창단 초기 경쟁력만큼은 LG가 크게 앞서는 모습이었다. “탄탄한 수비 농구를 보여주겠다”라는 이충희 감독의 청사진대로 LG는 신생팀 돌풍을 일으켰다. SK가 창단 첫 시즌 10위(13승 42패)에 그친 반면, LG는 대전 현대(현 전주 KCC)에 이어 정규리그 준우승(28승 17패)을 달성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정돈된 수비력을 보여준 LG는 4라운드 전승을 기록하는가 하면, 평균 86.7실점으로 이 부문 2위에도 올랐다.
팀 득점(89.9점)은 8위였지만, 상대가 체감한 LG의 화력은 기록 이상이었다. 양희승이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14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버나드 블런트는 상대가 1대1로 막는 게 버거운 득점기계였다. 여러 팀이 더블팀, 더 나아가 트리플팀까지 구사했으나 수비 전술이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블런트를 활용한 아이솔레이션은 알고도 못 막는 LG의 필살기였다. LG는 비록 4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에 1승 3패로 밀리며 시즌을 마쳤지만, 신생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래를 기대하기에 충분한 성적이었다.
1998-1999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올랐던 LG는 1999-2000시즌에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블런트가 시즌 개막이 임박한 시점에 야반도주, 미국으로 돌아간 것. 이미 연봉의 1/4 이상을 수령한 블런트는 IBL(미국 하부리그) 트렌트 슈팅스타즈와 이중계약을 맺으며 LG의 뒤통수를 때렸다. 하루아침에 주득점원을 잃은 LG는 수비력만큼은 유지하며 중위권을 추격했지만, 6위 기아에 1경기 차로 밀리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개막 사흘 전이었는데 블런트가 오전 운동에 나오지 않았다. 가끔 그런 날도 있어서 그러려니 했고, 방에서 TV 소리도 들려 의심하지 않았다. 오후 들어 낌새가 이상해 방문을 열어보니 짐이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신인이었던 (이)홍수에게 차를 빌려 직접 공항까지 가서 미국으로 도망갔다. 블런트 대신 온 선수(마일로 브룩스)도 가관이었다. 감독님에게 주먹질을 하질 않나…. 어느 날은 훈련 도중 갑자기 텅 빈 관중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니까 ‘얼마 전 죽은 형이 와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하더라. 정말 뭔가를 본 것인지, 운동이 하기 싫었던 것인지….” 당시 LG 선수였던 박훈근의 회고다.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LG는 김태환 감독을 신임 사령탑으로 선임, 체질 개선에 나섰다. “결국 농구는 적게 허용하는 팀보다는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김태환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후 대대적으로 전력을 개편했다. 장신 라인업을 꿈꾼 현대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양희승-조성원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박훈근을 카드로 내세워 조우현까지 영입했다. 쌍포를 구축한 LG는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득점력이 검증된 에릭 이버츠를 지명, 새로운 팀으로 변모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LG는 2000-2001시즌에 화끈한 공격농구를 앞세워 수원 삼성(현 서울 삼성)에 이어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당시 LG가 기록한 103.3점은 10구단 체제가 갖춰진 후 KBL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평균 세 자리 득점이다. 공격농구를 이끈 조성원은 LG 역사상 첫 정규리그 MVP로 선정됐다.
LG는 4강에서 SK와 5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재계 라이벌인 삼성을 넘진 못했다. 주희정, 문경은, 이규섭, 아티머스 맥클래리, 무스타파 호프로 이어지는 삼성의 주전 라인업은 LG의 장점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김태환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김태진, 구병두를 선발 투입하는 등 변칙적인 용병술로 맞섰으나 한계가 분명했다. LG가 겪고 있는 지독한 준우승 잔혹사의 시작이었다.
2001-2002시즌 정규리그 5위에 그쳤던 LG가 상위권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테랑 강동희, 리바운드 1위 라이언 페리맨을 영입하며 화력에 노련함을 더한 LG는 2002-2003시즌 내내 대구 동양과 1위 경쟁을 펼쳤다. 강동희는 정규리그 MVP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건재를 과시했고, 시즌 중반 조성원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영입한 김영만은 공수에 걸쳐 안정감을 더했다.
LG의 정규리그 최종 전적은 38승 16패. 동양과의 상대 전적(2승 4패)에서 밀려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에 실패했지만, 2000-2001시즌 준우승의 아쉬움을 만회할 찬스를 맞이한 것은 분명했다.
4강에 직행한 LG의 상대는 원주 TG(현 DB). 중앙대-기아자동차에서 전성기를 함께 한 콤비 강동희-허재의 첫 플레이오프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모은 시리즈였지만, LG의 도전은 이전 시즌에 이어 다시 4강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LG는 2승 2패로 맞선 5차전에서 한때 격차를 18점까지 벌리며 챔피언결정전에 다가가는 듯했지만, 후반에 폭발한 데이비드 잭슨의 3점슛을 막지 못하며 역전패했다.
2003-2004시즌에도 4강의 벽을 넘지 못한 LG는 2004년 김태환 감독이 물러나며 침체기를 걸었다. 2004-2005시즌에 팀 역대 최다인 11연패에 빠지는 등 유례없는 부진을 겪어 9위에 머물렀다. 2005-2006시즌 역시 당시 KBL 최다 우승 경력을 자랑하는 신선우 감독을 영입하며 부활을 꿈꿨지만, 8위로 시즌을 마쳤다. 블런트가 야반도주한 1999-2000시즌이 팀 역사상 유일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였던 LG에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은 수치스러운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차기 시즌을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는 자극제가 됐다.
LG는 2006년 FA시장에서 리그 최고의 슈터 가운데 1명으로 꼽히는 조상현을 영입했다. 희대의 시간 차 트레이드를 단행해 비난이 쏟아졌지만, 국내선수 전력만큼은 별다른 누수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LG가 가장 공을 들인 작업은 외국선수 계약이었다. LG는 신선우 감독이 KCC 사령탑 당시 발굴했던 외국선수 MVP 출신 찰스 민렌드를 영입했고, 남은 한 자리는 퍼비스 파스코로 채웠다. 파스코는 이탈리아, 튀르키예 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지만 만 25세에 불과한 신예였다. 공격이 단조롭지만, 뛰어난 탄력과 기동력을 지녀 수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막 5연승으로 2006-2007시즌을 시작한 LG는 탄탄한 주전 라인업을 토대로 순항을 이어갔다. 양동근이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돌아온 모비스와 함께 안정적으로 승수를 쌓으며 선두권에서 레이스를 이어갔다.
2위 경쟁 중이었던 부산 KTF(현 KT)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맞대결에서도 승, 골 득실 우위를 점한 LG는 4시즌 만에 정규리그 준우승을 따내며 모처럼 챔피언결정전 우승에 도전하게 됐다. 모비스와의 정규리그 맞대결 전적 역시 동률(3승 3패)인 가운데 골 득실에서 앞섰기에 챔피언결정전만 진출한다면 한을 풀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무리가 아니었다.
LG는 예상치 못한 상황서 변수를 맞았다. 2007년 4월 12일. LG의 창단 첫 우승 희망이 사라진 날이다. KTF와의 4강에서 1승 2패 열세에 몰린 LG는 4차전에서 1쿼터 중반 파스코가 장영재의 거친 파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화를 참지 못한 파스코는 장영재를 밀쳤고, 심판은 곧바로 퇴장을 명령했다.
여기서 KBL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파스코가 퇴장 명령을 내린 심판까지 밀친 것. 2쿼터를 제외하면 외국선수 2명 모두 출전이 가능했던 제도에서 외국선수 1명의 공백은 컸다. LG는 파스코 공백을 메우지 못하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했다.
KBL은 이튿날 긴급 재정위원회를 개최, 파스코를 영구제명했다. KBL 출범 첫 영구 제명이었다. 당시 동료였던 현주엽은 “장영재의 수비가 거칠었는데 심판이 반칙으로 불어주지 않은 장면이 많았다. 그게 쌓이다 보니 파스코가 폭발했다. 팀에서 항의라도 해줬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보니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2007-2008시즌부터 4시즌 연속 6강에 머물렀던 LG는 2011년 계약이 만료된 강을준 감독의 후임으로 김진 감독을 선임했다. LG는 김진 감독 부임 후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2012-2013시즌 막판 모비스에 로드 벤슨을 넘겨주며 시즌 종료 후 김시래를 받는 트레이드에 합의했고,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에 따른 1순위 지명권 확률 25%는 1순위라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LG는 이를 통해 2013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김종규를 지명, 숙원이었던 토종 빅맨을 손에 넣었다.
드래프트에 앞서 문태종, 데이본 제퍼슨을 영입하는 등 내외곽에 걸쳐 전력을 보강한 LG는 2013-2014시즌에 신바람을 냈다. 모비스, SK와 유례없는 3강 경쟁을 펼친 LG는 순위 싸움의 분수령이었던 5라운드 막판부터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 이르기까지 13연승을 질주, 팀 역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2014-2015시즌 첫 경기까지 더한 14연승은 여전히 LG의 팀 최다 연승으로 남아있다.
매진 사례를 이룬 창원 팬들 앞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으며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다짐했던 LG는 4강에서 KT를 3승 무패로 제압, 김태환 감독 시절 이후 첫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득점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제퍼슨은 창단 첫 우승을 노리는 LG의 믿는 구석이었다.
적장 유재학 감독 역시 “수준이 다른 선수다. 득점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 자유계약 시절 외국선수들보다 나은 것 같다”라며 제퍼슨에 대한 경계심을 표했지만, 이번에도 챔피언결정전은 LG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1차전에서 패한 LG는 2연승하며 시리즈 리드를 가져온 것도 잠시, 4차전부터 3연패하며 안방에서 모비스에 우승 트로피를 넘겨줬다. 막판 2경기는 3점 이내의 접전이었다는 점, 2승 3패로 몰린 6차전에 김시래가 결장했다는 점에서 LG로선 어느 때보다 아쉬움이 짙게 남는 결과였다.
LG는 핵심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2014-2015시즌에 재도전했지만, 챔피언결정전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악재가 발생했다. 모비스와의 4강 1차전에 앞서 국민의례 도중 스트레칭을 한 제퍼슨이 도마에 오른 것.
LG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진화에 나섰지만, 혹 떼러 갔다 혹 붙여온 격이 됐다. 제퍼슨은 “어깨에 통증이 있어 스트레칭을 했다. 한국인들이 봤을 때 무례하게 비춰졌거나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면 정말 죄송하다”라고 사과의 뜻을 표했지만, 기자회견 직전 소셜미디어에 양 손가락으로 욕설을 하는 사진을 게재한 게 포착됐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당시 기자회견 진행을 담당했던 LG 홍보 담당자의 당혹스러워한 표정은 여전히 기자의 뇌리에 선하다.
LG는 곧바로 제퍼슨을 퇴출시켰다. “단순히 국민의례 때 스트레칭을 했다는 것만으로 퇴출 조치를 내린 게 아니다. 그동안 벌인 불미스러운 행동까지 감안해 내린 결정”이라는 게 LG의 설명이었다.
블런트, 파스코에 이어 또 외국선수와 관련해 유쾌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LG는 외국선수 1명으로 4강 5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지만,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진 못했다. 탈락 위기에 놓인 4강 4차전에서 시리즈를 5차전으로 끌고 간 승리는 여전히 LG가 4강에서 거둔 마지막 승으로 남아있다.
역대급 전력을 구축하고도 2시즌 연속 우승에 실패한 LG는 곧바로 팀 창단 후 가장 긴 암흑기를 맞았다. 2015-2016시즌을 시작으로 2017-2018시즌에 이르기까지 팀 역사상 처음으로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18-2019시즌 막판 상승세를 그리며 정규리그 3위에 이어 4강까지 올랐지만, 일장춘몽이었다. LG는 2018-2019시즌 종료 후 김종규가 FA 자격을 취득, DB로 떠난 후 다시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19-2020시즌은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조기 종료였지만, 이 시점에서의 성적(19승 26패, 9위)이나 경기력 역시 플레이오프는 엄두도 못 낼 수준이었다.
최근 7시즌 동안 6차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LG의 구세주는 조상현 남자농구대표팀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 FA 협상을 통해 가세한 2006-2007시즌에 그랬듯, LG는 조상현 감독이 부임한 첫 시즌에 정규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필리핀 아시아쿼터 저스틴 구탕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전력 보강이 없었지만, 조상현 감독은 탄탄한 수비력을 불어넣으며 LG를 승리에 익숙한 팀으로 만들었다.
LG는 평균 76.6실점을 기록, 이 부문 1위에 오른 가운데 2연패를 2번만 기록할 정도로 기복없이 승수를 쌓았다. 확고한 주전 라인업과 탄탄한 세컷 유닛을 형성한 LG는 비록 아셈 마레이가 자리를 비워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했지만, SK와의 4강 3경기 모두 5점 차 이내의 접전을 펼치는 등 끈끈한 팀 컬러를 보여줬다.
KBL에서 정규리그 준우승을 가장 많이 기록한 팀은 LG와 현대모비스다. 나란히 5차례 준우승을 경험했지만, 두 팀이 쌓은 역사는 하늘과 땅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현대모비스는 역대 최다인 7차례 우승을 차지한 명가가 된 반면, LG는 여전히 우승 경험이 없다.
요인을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연속성이 부족했다는 점은 준우승 잔혹사를 반복한 LG가 유념해야 할 항목 가운데 하나다. LG는 KBL에서 가장 많은 정규리그 준우승 트로피를 보유했지만, 2시즌 연속 4강에 직행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결국 2022-2023시즌에 이룬 성과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LG가 준우승 잔혹사를 끊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멍석은 마련됐다. LG는 FA 양홍석을 영입하며 약점으로 꼽힌 3번을 보강했고, 이례적으로 프로 감독 첫 시즌을 마친 조상현 감독과 연장 계약을 맺었다. 2025-2026시즌까지 계약을 보장하며 조상현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고, 마레이와 단테 커닝햄 역시 차기 시즌을 함께 한다. LG는 오프시즌을 알차게 보내며 재도약의 채비를 마쳤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벚꽃명소가 유난히 많은 창원이 진정한 봄날을 맞이할지 지켜볼 일이다.
LG 정규리그 or 챔피언결정전 준우승 사례
1997-1998시즌 정규리그 2위(28승 17패) PO 4강
2000-2001시즌 정규리그 2위(30승 15패) PO 준우승
2002-2003시즌 정규리그 2위38승 16패) PO 4강
2006-2007시즌 정규리그 2위(32승 22패) PO 4강
2013-2014시즌 정규리그 1위(40승 14패) PO 준우승
2022-2023시즌 정규리그 2위(36승 18패) PO 4강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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