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폭염·흉기난동에 태풍까지… 정부 속태우는 소비 위축 악재의 연속
흉기 난동에 태풍 상륙 초읽기까지 악재
국외선 유가 재상승에 곡물 가격도 꿈틀
“소비 회복세 지속하도록 정책지원 필요”
서울 서대문역 인근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김보라(33) 씨는 신림동과 서현역 등에서 잇달아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이후 명동으로 쇼핑하러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김 씨는 “무고한 시민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 마음이 아프다”며 “당분간 불필요한 외출은 자제할 것”이라고 했다.
경기도 부천에 사는 가정주부 박나래(35) 씨는 폭우·폭염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한 탓에 장 보는 게 두려워졌다. 박 씨는 “가족과 식당에 갔는데 셀프 반찬 코너에서 상추만 따로 추가 요금을 받는 걸 보고 놀랐다”며 “씀씀이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 소비 위축의 원인이 될 법한 악재가 연거푸 터지면서 내수 진작에 사활을 건 정부가 속을 썩고 있다. 민간 소비는 올해 상반기 수출·투자가 부진한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폭우·폭염 등의 자연재해가 국제 곡물가·유가 상승 흐름과 맞물리면서 체감 물가에 상방 압력을 가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기 난동과 칼부림 예고 글까지 등장하며 정부의 소비 활성화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 국내 농산물뿐 아니라 국제 곡물·원유 가격도 오름세
9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올해 1~7월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 누계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5% 상승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7월(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 3월(4.8%) 약 2년 만에 소비자물가 총지수(4.2%)를 추월한 근원물가는 7월 현재 총지수(3.7%)와 격차를 0.8%포인트(p)까지 벌리며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근원물가는 계절적 영향을 받는 농산물과 국제유가 변동에 취약한 석유류 관련 품목을 제외하고 산출한다. 근원물가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촉발한 공급 측 인플레이션이 서비스 가격 등 수요 측 물가 상승으로 이미 넘어갔다는 의미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근원물가가 계속 높은 주된 이유로 외식 물가가 주도하는 높은 서비스 물가를 꼽는다.
문제는 농산물·석유류 등 공급 측 요인을 자극할 이슈가 자꾸 발생한다는 점이다. 7월 말 폭우에 이어 8월부터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이달 4일 기준 적상추(100g)의 평균 소매가격은 2310원으로 1개월 전(1143원)보다 102.1% 올랐다. 같은 기간 시금치(100g)는 930원에서 2286원으로 145.8% 치솟았다. 열무(100g) 역시 3057원에서 4589원으로 50% 올랐다.
지난 6월 배럴당 6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도 다시 80달러를 웃돌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의 감산 기조가 유가 상승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여기에 이달 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공격에 대응해 노보로시스크 항구를 공습한 일도 유가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노보로시스크 항구는 세계 원유 공급량의 약 2%가 수출되는 항구다.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날씨와 러시아의 흑해 곡물 수출 협정 탈퇴 등은 빵·라면·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의 재료인 곡물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7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23.9로 전월(122.4)보다 1.3% 상승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식량 인플레이션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새로운 동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흉기 난동에 방향 튼 태풍까지
이런 상황도 모자라 국내에서는 흉기 난동과 같은 끔찍한 사건마저 터졌다. 사건 이후 서현역 주변 상점들 매출이 크게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흉기 난동 등의 악재가 당장 경제 지표에 유의미한 수치로 반영되는 건 아닐지라도, 사회적 공포감을 조장하는 이슈는 소비심리에 직·간접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제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끝나지 않은 여름휴가 시즌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윤석열 정부 경제팀을 심란하게 하는 요소다. 기상청에 따르면 카눈은 오는 10일 오전 9시 통영 서쪽 약 30㎞ 부근 해상에 접근한 뒤 한반도로 상륙할 예정이다. 기상청은 카눈이 뿌릴 폭우와 강풍 위력이 거셀 것이라며 외출 자제를 당부했다.
정부는 잇달아 쏟아지는 악재가 하반기 내수 진작 정책의 발목을 잡을 수 있어 노심초사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부산·인천·대전·전주·강릉·통영·진주 등 전국 7개 도시를 ‘야간 관광 특화 도시’로 명명하고, 인구 소멸 위기를 겪는 지역을 방문하면 각종 할인 혜택을 주는 ‘디지털 관광 주민증’ 대상 지역을 넓히겠다고 했다.
또 중소기업 제품을 대형마트·백화점과 연계해 대규모로 할인 판매하는 동행 축제를 9월에 개최할 방침이다. 일본·대만·중국 등에서 오는 관광객에게는 무료 왕복 항공권을 증정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금리와 물가 여건상 소비의 하방 리스크가 산재해 있다”며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민간소비 회복세가 지속할 수 있도록 꾸준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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