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올바름과 알맞음 사이
출간 전 소설 원고를 읽다가 한 문장에 눈길이 멈췄다. ‘이 년놈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평소라면 두음법칙을 적용해 ‘년놈’을 ‘연놈’으로 고치고 넘어갔겠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남녀’ ‘부모’ ‘남매’ ‘신랑신부’ ‘장인장모’ 같은 단어를 보자면 대개 남자를 먼저 나열하는데, 왜 욕할 때만 여자가 먼저일까? 거기다 소설 속 상황은 남자 쪽에 대한 분노가 더 큰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단어를 ‘놈년’으로 고치자니 문제가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연놈’은 등재가 되어 있는데 ‘놈년’은 없기 때문이었다. 아예 다른 표현으로 바꿔 쓰면서도 마음속에 찜찜함이 남았다. ‘사전까지 이래도 돼?’
이런 장면을 만난 적도 있다. 회사의 여자 부장이 직원들을 향해 실없는 농담을 시작한다. ‘얘들아, 아무 선택도 안 하는 나라 이름이 뭔지 알아?’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진다. ‘앙골라야.’ 곧이어 직원들의 야유가 쏟아진다. ‘아유, 부장님 아재세요? 아재개그 좀 그만하세요.’ 또 고민이 시작된다. 여성인 부장을 향해 아저씨의 낮춤말인 ‘아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부장님 아줌마세요? 아줌마개그 좀 그만하세요’라고 쓰자니 의미가 아예 달라진다. 심지어 처음의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건방진 직원이 상사에게 대드는 느낌까지 준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생각하다 원래대로 두기로 한다. 아재개그는 이제 고유명사지 뭐, 하고 지나가면서도 의문이 생긴다. ‘왜 아재개그는 있는데 아줌마개그는 없는 걸까?’
이런 교정을 거치며 스스로 문제의식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도 잠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 책이 지난해 제일 효자 상품이었어요.” 아차 싶다. 책에 성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딸이 아니라 아들을 삼았을까. 그러면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그런데 어떻게 말했다면 좋았을까. 인기 상품? 주력 상품? 무얼 넣어봐도 그 뉘앙스가 아니다. 올바름과 알맞음 사이, 단어를 고르는 일이 오늘도 이렇게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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