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통합적 개혁주의 길 갔던 선각자”… 분열된 오늘에도 큰 울림

이소연 기자 2023. 8.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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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4000년을 통하여 역사적 변천과 정치적 흥체가 반복무상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조선인의 조선이라는 관념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멸망은) 역대 왕조 자체의 정치적 흥망에 불과한 것이고 결코 조선민족 자체의 근본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회의(범태평양 민족회의)에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을 겸해 참석한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 귀국 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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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 문집 ‘거인의 숨결’ 개정증보
3·1운동 기획뒤 1년반 동안 옥고
자유-평등-포용 민주국가 건국 앞장
“고하 민족주의의 근대성 평가돼야”
1926년 9월 8일 보안법 위반죄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고하 송진우 선생의 모습. 동아일보 주필이던 고하는 그해 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전하는 3·1운동 7주년 기념 축전을 번역해 3월 5일 자 동아일보에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가 일제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 4000년을 통하여 역사적 변천과 정치적 흥체가 반복무상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조선인의 조선이라는 관념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멸망은) 역대 왕조 자체의 정치적 흥망에 불과한 것이고 결코 조선민족 자체의 근본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회의(범태평양 민족회의)에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을 겸해 참석한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 귀국 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의 일부다. 그해 8월 28일∼9월 6일 10회에 걸쳐 실은 이 논설에서 고하는 비록 조선은 망했으나 조선인의 정체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 문제는 민족 자체의 단합이 확립하는 그날로부터 해결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 논설은 신동아가 1966년 기획한 ‘근대 한국 명논설’ 66편 중 하나로 선정돼 1967년 신동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도 간행됐다.

고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기획한 48인 중 한 명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3대, 6대, 8대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었으며, 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한 교육자,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초대 수석총무(당수)로 민주국가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1일 고하의 글 49편과 그와 관련된 인물평, 일화 등을 담은 자료 67편을 엮은 ‘거인의 숨결’(이야기의숲)을 펴냈다. 동아일보 창간 70주년과 고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0년 출간했던 책을 33년 만에 개정증보한 것이다.

33년 만에 개정증보돼 출간된 ‘거인의 숨결’ 표지.
개정증보판엔 고하를 평가하는 최근의 새로운 글들이 포함됐다. 박찬욱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부)는 올 4월 서울 YMCA 창립 1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에서 “고하 선생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된 자유, 평등, 민주 사상을 수용한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고하의 민족주의와 함께 그의 사상이 지닌 근대성도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익의 분열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동시에 사회주의를 포용했던 고하의 중용 정신을 조명한 글도 실렸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2011년 고하 탄생 121주년 강연 ‘송진우의 중용적 진보와 근대국민국가 건설’에서 “고하 선생은 동아일보에 다수의 사회주의자들도 기고할 수 있도록 해 이념적 포용의 폭을 보여줬다”고 했다. 광복 후 공산주의에 대해선 분명한 반대 노선을 견지했으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공론장을 열어 뒀다는 평가다. 박 교수는 한민당의 정강정책과 ‘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고하의 발언을 토대로 “고하는 복지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반세기 전 이미 천명한 선구자”라고 봤다. 이어 “중용적·통합적 개혁주의의 길을 갔던 이 뛰어난 선각의 길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하의 마지막 논설도 실렸다. 그는 1945년 12월 29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담화 ‘최후까지 투쟁하자’에서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로서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중한 반탁론을 폈던 그는 그해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극우계 청년 한현우 등에게 암살됐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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